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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에도 스펙 다이어트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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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채용시즌이 돌아왔다. 이 맘 때면 지원자도, 뽑는 기업도 피를 말리는 과정을 거친다. 어떻게든 합격하려는 취업준비생과 좀 더 나은 인재를 골라내려는 기업 간의 줄다리기가 팽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채용 현장에 새 바람이 불고 있다. 심지어 청년이 구름처럼 몰리던 공기업에는 응시자가 확 줄어드는 현상까지 나타난다. 토익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이 쟁쟁한 학벌을 가진 대졸자를 제치고 공기업이나 대기업에 합격하기도 한다. 이른바 직무능력중심(NCS) 채용이 확산하고 있어서다. 고용노동부가 NCS를 기반으로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대기업과 공기업 25곳을 조사한 결과 16개 기업이 영어점수를 아예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들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간 고졸자의 77%, 전문대졸자의 89%, 박사급 80%가 공인영어점수가 없었다. 오히려 4년제 대학 졸업자는 80%가 공인어학점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졸자들이 스펙에 얼마나 매달리는지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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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그룹은 지난해 상반기부터 입사지원서에 사진이나 수상경력, 어학연수, 동아리활동과 같은 기타 활동 기재란을 없앴다. 직무능력과 무관하다는 판단에서다. 오히려 해당 직무와 관련된 에세이를 요구한다. 실무능력 테스트 때는 회사별, 직무별 특성을 반영한 주제를 선정해 미션을 수행토록 하거나 오디션을 치른다.

한화그룹은 지원분야를 사업장·전공·팀·직무까지 세분화해서 공고한다. 관련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만 지원하라는 얘기다. 심지어 서류전형에선 전공수강과목과 직무관련 경력사항을 살핀다. 어학점수는 해외영업과 같은 반드시 필요한 직무에 한정해서 요구한다.

공기업이라고 다르지 않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어학과, 학점, 학력을 보던 기존 방식을 지난해 폐기했다. 대신 연구직은 연구실적, 기술과 행정직은 해당 직무 수행능력을 평가한다. 이런 방식을 채택하자 2014년엔 연구직 신입사원 17명이 모두 박사였지만 지난해엔 9명 중 5명이 석사였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취업준비생이 과도하게 스펙쌓기에 투자하는 나라도 없다. 2012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대졸자의 평균 스펙비용을 조사했더니 1인당 4269만원에 달했다. 최근엔 5000만원이 넘는다는 민간단체 조사까지 나오는 판이다. 어학수강, 해외어학연수, 자격취득, 공모전 준비 같은데 쏟아붓는 돈이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해서 합격했다면 회사에서 핵심인력으로 커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직업능력개발원이 스펙비용을 조사한 이듬해 한국경영자총협회가 355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충격적이다. 신입사원을 교육하는데 18.3개월이 소요됐다. 나름대로 막강한 스펙을 갖췄다는데도 이 정도 교육해야 현장에 투입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드는 비용만 1인당 5959만6000원이었다. 취업준비생이 쓴 스펙비용까지 따지면 1억원이 넘는 돈을 퍼부어야 일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교육 뒤 회사에 계속 다니는 것도 아니다. 2014년 경총이 전국 405개 기업을 대상으로 신입사원 채용실태를 조사했더니 4명 중 한 명 꼴인 25.1%가 1년 안에 그만뒀다. 조기 퇴사하는 이유는 더 기막히다. 두 명 중 한 명이 업무(직무)적응실패를 꼽았다. 안 맞는 직장에 들어갔다는 말이다. 교육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들인 회사나 취업준비생의 손해도 만만찮지만 사회적 낭비도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지난해부터 이런 채용시장이 확 바뀌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130개 공기업을 시작으로 KT, 현대카드, 현대모비스, 신한은행, CJ E&M 등 28개 대기업이 직무능력을 중시하는 채용시스템을 도입했다. 387개 중견기업도 컨설팅을 마치고 채용방식 변화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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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효과는 상당하다. 우선 출신대학이 다양해졌고, 무작정 시험이나 쳐보자며 덤벼드는 허수 응시자가 확 줄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의 경우 신입사원 가운데 고·전문대 출신이 2014년에는 한 명도 없었는데, 지난해엔 25%에 달했다. 허수 지원자가 사라지면서 응시자는 4833명에서 2263명으로 줄었다. 서부발전의 경우 신입직원 직무교육기간이 2014년 33주에서 지난해엔 20주로 40%나 단축됐다.

입사한 뒤 업무에 적응하지 못해 회사를 그만두는 중도퇴사율이 떨어진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늘 10명 중 한 명 꼴로 사표를 냈는데, 지난해엔 0%였다. 전기안전공사도 중도퇴사율이 18%에서 14%로, 서부발전은 8%에서 1%대로 떨어졌다.

스펙을 따지지 않고 직무능력에 초점을 맞춰 채용한 데 따른 순기능이다. 이런 순기능을 합하면 채용비용은 크게 줄어든다. 당연히 신규 입사자들의 만족도도 높다. 고용부 조사에 따르면 5점 만점을 기준으로 출신학교에 대한 차별이 없고(4.13점), 과도한 스펙 요구하지 않고(3.75점), 직무능력을 우선시한다(3.48점)는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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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아직도 취업 준비생들이 스펙에 대한 환상을 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은 여전히 책상머리에서 케케묵은 이론수업에 매달린다. 물론 꼭 필요한 이론도 있지만 실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게 대부분이다. 사회에 나가 뭐가 필요한 지 가르치는 경우는 드물다. 이러니 무조건 스펙에 매달리는 지도 모른다. 기업이 막대한 돈을 들여 새로 교육시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학생 10명 중 7명이 교육에 불만을 표했다. 부실한 커리큘럼, 능력미달 교수진, 낮은 취업률을 그 이유로 꼽았다. 독일 같은 경우는 기술의 변화에 따라 학과 통폐합이 일상화돼 있다. 시장에서 도태된 기술을 가르치는 건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도 이런 인식이 필요하다. 학생은 취업에 목을 매는데, 학교가 바뀌지 않으면 미스매치(불균형)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업도 각 분야별 직무에 필요한 사안을 개발해 공개할 필요가 있다. 그걸 갖추기 위해 어떤 전공과목을 수료하고, 실무를 쌓아야 하는지와 같은 세세한 준비과정도 제시해야 한다. 필요하면 인턴을 확 늘려 대학이 수행하지 못하는 실무교육기능을 확충하는 방안도 생각해야 한다. 그게 입사지원자에 대한 배려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다. 물론 이를 뒷받침하는 정부 정책과 지원도 뒤따라야 한다.

가뜩이나 직무 중심으로 임금체계를 바꾸는 작업이 한창이다. 임금체계를 바꾼다면 채용문화도 그에 걸맞게 변해야 한다. 노동시장의 생태계를 선진화하는 길이다. 그러려면 법적 개혁조치와 함께 교육계, 정부, 기업, 취업준비생의 인식 경장(更張)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실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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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 Another] 직무능력채용이 사교육을 부추긴다? 
학벌이나 어학 성적과 같은 스펙 대신 직무능력을 따져 신입사원을 뽑는 데 대해 또 다른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반론이 만만찮다. 이런 반론은 대체로 취업준비생에게서 나온다. 채용시험 방식이 바뀌니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실제로 직무능력 채용 과정을 뚫게 해주겠다는 학원도 생기고 있다. 그러나 북적대기만 할 뿐 효과는 거의 없다는 게 취업준비생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서울 강남의 직무능력 관련 학원은 수강료가 40만원에 달한다. 그래도 개설하자마자 정원이 꽉 찬다. 온라인 강좌도 성행이다. 수강료는 학원보다 저렴한 9만~10만원 정도다. 직무능력을 기준으로 뽑는 채용 방식이 학원가에선 블루오션으로 등장하는 모양새다.

그런데 북적대기만 할 뿐 정작 취업에는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게 취업준비생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얼마전 공기업 시험을 봤다는 이모(28)씨는 "어떻게 시험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학원을 찾았었다"며 "막상 시험에선 실무 위주의 질문과 면접이 이어져 학원에서 들은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불안한 취업준비생의 심리를 이용해 한탕주의를 노리는 학원일 뿐이라는 얘기다.

결국 직무능력 중심의 채용과정을 통과하려면 꼼꼼한 관리와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싶은 지 정해야 한다. 예컨대 무역분야에서 크고 싶다면 관련 경영전공과목을 이수하는 것은 물론 어학과 해당 회사가 생산하는 물품의 특성, 해외시장 돌파 방법 등을 종합적으로 고민하고, 관련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 면접이나 자기소개서를 쓸 때도 그 간의 준비과정과 왜 이걸 하고 싶은지를 어필할 필요가 있다. 이런 건 학원에서 단기간에 충족시킬 수 없다. 사교육 시장을 기웃거리면 돈만 버리고, 취업을 위한 진짜 능력배양 시기를 놓칠 수 있다는 얘기다.

닛산자동차에 취업한 지방대생의 이야기가 도움이 될 듯하다. 다음달부터 닛산자동차 일본 본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는 이태현(26)씨도 대학에 다닐 때 스펙에 목을 맸다. 하지만 영어성적은 또래보다 훨씬 낮았다. 그나마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다 일본인 친구를 만나 어울리면서 일어가 늘었다. 그러다 닛산자동차 인턴공고를 보고 일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응시했고, 인턴으로 근무했다. 80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인턴이 끝난 뒤 한국에 돌아와 전기자동차와 관련된 전공과목을 섭렵했다. 사전에 현지 기업채용박람회를 찾아 가상 면접시험을 치르며 감각을 다듬었다. 그리고 신규채용 시험에 응시했다. 전공과 관련된 질문이 쏟아졌지만 큰 문제가 없었다. 철저한 직무능력 중심 시험이었다. 결국 능력중심 채용시장에선 특정 직무에 맞는 자신의 능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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