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독설과 짜증, 그리고 배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박신홍 기자 중앙일보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기사 이미지

박신홍
사회부문 차장

겉은 멀쩡하다. 평소엔 참 친절하고 표정도 한없이 부드럽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독설을 퍼붓고 짜증을 내며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표변한다. 딴사람 얘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곁의 회사 상사·동료와 가족·친구들 모습이 그렇다. 그러다 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정상으로 되돌아간다. 마치 두 얼굴의 인간인 헐크나 하이드의 현대판 재림 같다.

요즘 주변에서 “왜 말을 저렇게 콕콕 찌르면서 할까. 왜 입만 열면 짜증일까 싶은 사람이 부쩍 늘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살짝만 건드려도 금세 폭발할 것만 같은 사람, 언제 속사포처럼 쏘아댈지 몰라 늘 조마조마한 사람, 틈만 나면 독설과 짜증으로 가슴을 후벼대 곁에 있기 부담스러운 사람 말이다.

회사에서 힘든 이유가 일이 10이라면 사람이 90이라는데, 상사의 말 한마디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윗사람에겐 입속의 혀처럼 처신하다가도 돌아서면 아랫사람에게 독설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가정에선 또 어떤가. 국립국어원 조사 결과 부부 간 대화가 만족스럽지 못한 이유 중 1위는 짜증 섞인 말투(34.7%)였다. 3위인 화를 내는 태도(13.3%)까지 합하면 절반에 가까운 부부(48.0%)는 짜증과 화 때문에 틀어지고 있다.

독설과 짜증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마음속 여유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송곳이 채우면서 나타나는 쌍둥이 현상이다. 정신과 전문가들은 이를 번아웃 신드롬(burnout syndrome·소진증후군)의 한 양태로 분석한다. 스마트폰도 장시간 사용하면 배터리가 나가듯,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생존에 몸부림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의 배터리도 방전돼 버린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아주 미세한 외부 자극에도 짜증이 팍 나고 자기도 모르게 독설이 튀어나오며 소통은 거칠어지기 십상이다.

이 같은 정신적 질환은 이미 우리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달 정부의 정신질환 실태 조사 결과 국민 네 명 중 한 명(24.7%)은 불안·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앓고 있거나 한 번 이상 앓은 적이 있었다. 지난해까지 4년 연속 국내에서 가장 많이 개발된 복제약도 항우울제 등 정신신경계 의약품이었다.

인간 관계의 기본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다. 하지만 독설과 짜증이 만연하면서 배려는 설 땅이 없어졌다. 배려가 사라진 인간 사회는 연골 없는 무릎과 같다. 미셸 푸코가 말한 자기 배려까진 아니더라도 남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는 것은 삼가야 하지 않겠나. 미안하다는 말,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 관계는 이 작은 것의 부재에서 틀어진다.

문제는 정작 본인은 독설을 내뱉거나 짜증을 내는 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쯤 해서 주위 동료나 가족들에게 겸허하게 물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혹시 내가 말할 때마다 짜증은 내지 않니? 내가 하는 말에 송곳이 달려 있진 않니?”

박신홍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