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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미국 황금시대 백악관의 막후 실력자 ‘퀸 낸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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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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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월 미국의 40대 대통령으로 취임 선서를 하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지켜보는 낸시 여사. [AP=뉴시스]

미국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제 40대)의 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가 6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벨에어 자택에서 울혈성 심부전으로 별세했다. 94세.

낸시 레이건 여사
로이터 “영향력 가장 셌던 영부인”
이란 - 콘트라 스캔들 적극 해결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부인 미셸 여사는 7일 성명을 내고 “낸시 여사의 삶과 지도에 감사하며 레이건 전 대통령(2004년 6월 사망)과 다시 함께 하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낸시 여사는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퍼스트레이디”(로이터통신)란 평가를 받았다. 뉴욕타임스도 이날 레이건 전 대통령와 절친했던 마이클 디버 전 백악관 비서실 차장을 인용, “낸시가 없었으면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1967~75)도, 레이건 대통령(81~89)도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낸시 여사는 21년 7월 6일 뉴욕에서 자동차 딜러인 아버지와 여배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명문 여대인 스미스칼리지 재학 때 연극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로 데뷔해 첫 작품 ‘류트 송(Lute Song)’에서 유명 배우 율 브리너와 연기하기도 했다.

그는 레이건 전 대통령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매카시즘(극단적 반공주의)이 할리우드를 강타하던 49년, 그는 공산주의 동조자 리스트가 보도된 신문에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동명이인임을 호소하기 위해 당시 영화배우 직능협회장이던 레이건 전 대통령을 처음으로 만났다. 3년 뒤 두 사람은 결혼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당시 이혼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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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 11월 한국 방문 당시 낸시 여사는 심장병 어린이 2명을 미국으로 데려가 치료했다. 사진은 미국 대통령 전용기에서 심장병 어린이 2명과 함께 한 낸시 여사. [AP=뉴시스]

백악관 시절 낸시 여사는 ‘막후 실력자’ 혹은 ‘퀸(여왕) 낸시’로 통했다. 각료 부인들과의 모임을 주도하며 정부의 원활한 정책 추진을 위해 각자의 네트워크를 최대한 가동하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남편이 이란-콘트라 스캔들로 큰 정치적 위기를 겪을 때 해결사로 나서기도 했다. 미국이 비밀리에 이란에 무기를 지원해 얻은 수익으로 니카라과 좌파 정권을 전복하려는 콘트라 반군을 지원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낸시 여사는 사건이 폭로된 책임을 물어 백악관 비서실장이던 도널드 리건의 해임을 주도했고, 남편에게 ‘대 국민 사과’를 하도록 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이 81년 3월 30일 워싱턴 힐튼 호텔 앞에서 총격을 당한 뒤에는 캘리포니아의 점성술사 조앤 퀴글리에게 크게 의지했다. 남편 재임 중엔 청소년 마약 퇴치 운동인 ‘저스트 세이 노(Just Say No)’ 캠페인, 퇴임 후에는 남편이 앓았던 알츠하이머에 대한 연구 지원에 헌신했다. 한국과는 83년 방한 당시 귀국길에 심장병 어린이 2명을 데려가 치료한 인연이 있다. 낸시 여사는 레이건 전 대통령의 묘소가 있는 캘리포니아 시미밸리의 ‘레이건 도서관’ 뜰에 함께 묻힐 예정이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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