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 훅 간다’는 배경막 앞에서 치고받은 새누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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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국회 새누리당 대표 회의실에 ‘정신차리자 한순간 훅 간다’고 쓴 배경막(백보드)이 등장했다. 조동원 홍보기획본부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공모한 500여 개의 댓글 중 쓴소리만 선정해 인쇄했다고 밝혔다. 원유철 원내대표(왼쪽)와 서청원 최고위원(오른쪽)이 배경막을 바라보고 있다. 김무성 대표(가운데)는 최고위원회의에서 “그 누구에게도 공천과 관련된 문건, 살생부 운운한 바 없다”고 말했다. [사진 강정현 기자]

29일 새누리당은 하루 종일 혼란스러웠다. 현역 의원 40명의 물갈이 명단을 뜻하는 이른바 ‘살생부’의 진상 규명을 위해 최고위원회만 오전·오후 세 차례 열고, 의원총회까지 소집했다.

김무성 “유언비어 얘기했을 따름”
정두언 “정확히 기억 안난다” 발빼
친박들 “책임자를 처벌하라” 고성
‘정신차리자’는 회의장 글귀만 공허

살생부 논란은 정두언 의원이 “김무성 대표가 ‘친박 핵심으로부터 현역 40여 명의 물갈이 요구 명단을 받았는데 당신 이름도 들어 있다’는 말을 내게 했다”고 주장하면서 불거졌다. 그래서 최고위원회의와 의총에서 친박계는 계속 김 대표와 정 의원을 몰아세웠다.

#1. 이날 오전 9시12분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 김 대표가 “제 입으로 공천과 관련된 문건 운운, 살생부 운운한 바 없다”고 말했다. “누구로부터 그 어떤 형태로든 공천 관련 문건 등을 받은 일이 없고 말을 전한 바도 없다. 최근 정가에 떠도는 유언비어를 종합하면 이런저런 말이 들린다고 얘기했을 따름”이라고 해명했다.

그러자 서청원 최고위원은 “김 대표가 뉴스의 중심에 서 있는데 죄송하다는 말을 안 하는 건 유감”이라고 비판했다. 다른 최고위원들도 “당이 자중지란으로 빠져들고 있다”(김태호), “진상을 명백히 밝혀 책임을 물어야 한다”(이인제)고 압박했다.

최고위원들은 논란의 당사자인 정 의원을 불러 이날 오후 1시30분 긴급 최고위를 다시 열기로 했다. 회의 후 당 관계자는 “김 대표와 정 의원이 다 나오면 ‘공천 살생부설’을 놓고 대질신문을 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 의원은 정식 통보를 받지 못했다며 오후 1시30분 열려던 2차 긴급 최고위에도 출석하지 않았다.

#2. 이날 오후 2시 의원총회. 정 의원은 의총 발언대에 섰다. 의총에선 발언 시작 전 김 대표가 정 의원에게 다가가 “정확하게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이에 정 의원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는 “김 대표로부터 그런 얘기(공천 살생부설)를 들은 것은 팩트”라며 공을 김 대표에게 넘겼다.

하지만 발언 수위는 낮췄다. 2시간가량 의총이 이어졌지만 두 사람은 그간의 공방 내용을 반복했다. 김 대표는 “(공천) 명부니 살생부니 말한 적이 없다”고 했고, 정 의원은 “김 대표가 ‘공천 살생부’라는 표현을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난 그런 취지로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친박계(김태흠·이우현·이장우 등) 의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라” “김 대표는 왜 그런 말(살생부)을 해서 분란을 만드느냐” “관련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항의했다.

한 수도권 의원은 “김 대표와 정 의원의 말은 결국 ‘별것도 아닌 ‘찌라시’를 갖고 왜들 호들갑이냐’는 건데 김 대표는 뭔가 저지른 다음이면 꼭 ‘찌라시’ 타령을 한다”고 비판했다.

분위기를 진정시킨 건 이재오 의원이었다. 그는 “18대 국회 때 내가 (공천에) 힘을 썼고 19대 땐 힘을 못 써 (친박과 비박이) 한 번씩 칼질을 주고받지 않았느냐”며 “이제 선거에 전념하자”고 다독였다.

#3. 이날 오후 4시30분 긴급 최고위. 정 의원은 당내 압박에 결국 최고위원회에 출석했다. 의총에서와 비슷한 해명을 하곤 20분 만에 자리를 떴다. “(그런 찌라시를) 누가 믿어요, 그걸”(김을동 의원)이라는 고성이 나왔다.

김 대표는 긴급 최고위 후 기자들을 만나 “당 대표로서 심려를 끼쳐 사과드린다”며 “공천과 관련해 공정성을 저해하는 일체의 언행에 대해 클린공천위가 조사해 엄중하게 처리 하겠다는 최고위 결정사항을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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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 대표 측근은 “원론적인 사과”라며 “앞으로 지역구 경선자 확정 과정 및 비례대표 선정 과정 등 당 공천과 관련해선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날 회의실 배경막(백보드)엔 ‘정신차리자 한순간에 훅 간다’ ‘생각 좀 하고 말하세요’ ‘알바도 니들처럼 하면 바로 짤린다’ 등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공모한 국민 쓴소리였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공당의 대표와 현직 의원이 검증도 안 된 발언을 주고받으며 결과적으로 큰 혼란만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글=현일훈·김경희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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