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턱 낮아지는 정신과 치료…전국 224곳에 '마음건강 주치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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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체를 운영하는 김모(53ㆍ서울 서초구)씨는 6~7개월 전부터 부쩍 의욕이 없고 밤에 잠이 오지 않는 경우가 잦아졌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증세는 갈수록 심해졌다.

정부 정신건강 종합대책 발표

결국 ‘확인이나 해보자’는 생각에 지난달 초 사무실 근처 병원의 정신과를 찾았다. 의사는 “아직 우울증까진 아니지만 더 심해지면 약을 먹어야 할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김씨는 “아무래도 정신과에 가는 게 꺼려진 건 사실이지만 막상 상담을 받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더 늦기 전에 가길 잘 했다”고 말했다.

앞으로 김씨처럼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초기 단계부터 적극적인 진단과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전국의 정신건강증진센터마다 정신과 의사가 배치되고 동네 의원도 정신질환 진단을 맡는다. 산부인과와 소아과에선 산모를 위한 산후 우울증 검사를 실시한다.

정부는 25일 국가정책조정회의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의 ‘정신건강 종합대책(2016~2020년)’을 발표했다. 2012년 보건복지부가 정신건강 대책을 내놓은 적이 있지만 범정부 차원의 종합대책이 나온 건 처음이다.

이번 대책은 우울증과 자살 등 우리 사회의 정신건강 문제가 심각하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됐다. 복지부 정신질환 실태 조사(2011년)에 따르면 국민 네 명 중 한 명은 한 번 이상 정신건강 문제를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의 16.9%만 정신과 진료를 받는 등 체계적 관리는 부족한 실정이다.

이처럼 ‘마음이 아픈’ 사람이 늘면서 자살률도 인구 10만 명당 27.3명(2014년)으로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차전경 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장은 “이번 조치는 사전 예방과 조기 치료를 통해 우울증을 줄여 자살률을 낮추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이를 위해 내년부터 정신건강 문제를 진단·치료하는 문턱을 대폭 낮춘다. 224개 전국 시·군·구 정신건강증진센터에는 ‘마음 건강 주치의’라는 이름의 정신과 전문의를 단계적으로 투입한다. 동네 의원 의사들 대상 교육도 강화한다. 실제로 지난해 복지부 조사 결과 자살자의 28.1%가 복통이나 불면증 등 ‘비정신적’ 증세로 동네 의원을 찾았다.

환자의 경제적 부담도 대폭 줄어든다. 내년부터 정신과 외래 진료비의 본인 부담률은 현행 30%(의원)~60%(상급종합병원)에서 20%로 낮아진다. 약제비 부담에 꾸준히 복용하기 어려운 비급여 의약품에 대한 보험 적용도 확대한다. 또 의사 상담료 수가를 조정해 약물 처방 외에 심층적인 상담 치료를 활성화하기로 했다.

자살을 직접 유발하는 요소에 대한 관리 강화에도 나선다. 복지부에 따르면 2014년 자살 유형 중 목을 매는 것(51.7%) 다음으로 많은 게 착화탄(번개탄)에 따른 가스 중독(15.4%)이었다. 수퍼마켓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 자살 도구로 널리 쓰였다.

이에 정부는 2020년까지 가스 중독 사망자를 20% 줄인다는 목표로 착화탄 판매 자체를 어렵게 할 방침이다. 진열대에서 직접 고르는 게 아니라 담배처럼 직원을 거쳐 구매하거나 주소·전화번호 등을 쓰게 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차 과장은 “홍콩에서도 10년 전 착화탄 판매를 제한했더니 이를 이용한 자살이 절반 이상 줄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이번 대책을 통해 2020년까지 우울증 환자 치료율을 30%까지 높이고 자살률도 인구 10만 명당 20명 수준으로 낮출 계획이다.

의료계 일각에선 정부 대책이 실효성을 담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홍나래 한림대성심병원 교수는 “전국의 모든 정신건강증진센터에 의사를 배치하려면 인력 수급과 예산 문제가 만만찮을 것”이라며 “동네 의원과 종합병원의 연계가 원활히 이뤄질지도 지켜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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