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청계천 복원만 하렵니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복닥거리는 서울의 사대문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마당 한구석에 오이.토마토.가지.고추 등을 키우는 작은 텃밭을 가꾸는 행운을 누린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텃밭에 대해 나는 이러쿵저러쿵 말할 만한 처지가 못 된다.

왜냐하면 책을 읽거나 인생사를 논하는 일을 빼고는 대체로 무심한 편인 나는, 저물도록 텃밭을 들락거리며 오이와 토마토가 얼마나 야무지게 달렸는지를 대견하게 전해 주시는 시어머니의 말씀이나, 기말고사를 코앞에 두고도 농약을 치지 않은 텃밭에 번성하는 이십팔점박이 무당벌레 잡기에만 혈안이 돼 있는 중3 큰아들의 무용담(?)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좀 달랐다. 일찌감치 텃밭을 둘러보고 오시는 어머니의 손에 희한한 오이 하나가 들려 있었던 것이다. 첫눈에 나는 그것이 오이인지 뭔지가 헷갈렸는데, 그것은 흔히 보는 것처럼 날씬하게 쪽 곧은 오이가 아니라 짤똥한 몸체가 흡사 똬리처럼 동그랗게 말린 오이였기 때문이다.

높이 웃자라는 줄기를 지탱하기 위해 덧대어준 꼬챙이가 가로 세로로 겹쳐 십자 모양을 이룬 바로 그곳에 달린 오이가 자꾸만 만나는 장애물을 피해 자라나다 보니 그렇게 희한한 모양이 된 것이었다.

오이의 정체를 알게 된 나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싸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것은 무엇보다 '세상에, 성장 과정에서 장애를 만나면 식물도 이렇거늘 하물며 사람은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감정은, 모든 인간의 모습에는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장애와 만나 그것을 상처로 남기기도 하고 극복하기도 한 아이의 모습이 숨어 있음을 깨달은 어미의 마음과 무관한 것이 아니리라. 하지만 나는 곧바로 마음을 접었다.

그래, 오이는 어디까지나 오이일 뿐이다. 썰기가 좀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썰고 나면 결국 다른 오이와 다를 것이 없으며, 어차피 우리 아이가 즐겨 먹는 산뜻한 오이나물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어머니는 달랐다."그 오이, 못 먹겠다" 하시며 영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시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멍청한 얼굴을 한 채 어머니를 쳐다보았는데, 곧이어 뭔가에 얻어맞은 듯한 깨달음을 얻었다.

음식물은 단지 영양을 보충하는 것일뿐 아니라 동식물의 생기를 인체의 그것으로 보충해 들이는 것이라는 점을.'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처럼 음식물의 미학은 단지 미학의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계속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이어갔다. 생명은 그것이 동식물이든 인간이든, 막힘 없이 뻗어나가도록 배려받을 수 있는 권리를 지녔다는 것을. 마치 아이들의 태(胎)인 여성이 건강하게 보호받고 동시에 아이들의 태인 사회가 건강하게 거듭나야 하는 것처럼 동식물의 태인 자연 역시 본래의 그러함대로 보존돼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 오이를 눈에 잘 띄는 냉장고 한 구석에 넣어둔 채 오래도록 보고 또 보아둠으로써 오이를 그 모양으로 자라게 만든 나의 무심함과 아울러 그 탓에 오이가 겪어야 했을 불편함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또 기억해둘 작정이다.

청계천 복원이 시작됐다. 산천을 생명으로 여긴 조상들의 시대는 멀리 아득하지만, 산천을 무심함으로써만 대한 근대 한국인들의 시대 역시 종말을 고하는 중이다. 이제 우리는 청계천 복원과 함께 산천을 생명으로 여긴 조상들의 지혜 역시 복원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우리는 근대 한국인들에게서 물려받은 업마저 지워나가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바로 이 순간, 나의 귓전에는 멀리 새만금의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는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새로운 업을 물려주려 하고 있지 않은가.

강영희 문화평론가

◇약력:문화평론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와 인터뷰집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