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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view &] 열정 목마른 대기업, 스타트업과 연애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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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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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이사

누가 뭐래도 현재 나라 경제의 근간은 수출이고, 그 주체는 대기업이다. 최근 들어,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어 왔던 수출이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더욱이 세계 경제의 전반적인 침체 양상과 맞물려 있어 독자적인 해법도 마땅히 없어 보인다. 과거 우리나라가 두 차례에 걸쳐 겪었던 경제위기는 금융·자산 가치 하락으로 인한 신용의 위기였다. 따라서 일시적인 침체를 겪기는 했으나 수출은 바로 회복됐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공급 과잉으로 인해 전반적인 제조업 자체가 위기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 되는 이유다.

미국 장수기업의 젊음 유지 비결
스타트업 통해 혁신 에너지 수혈
단순한 투자 넘어 지원·협력 통해
역경의 시기, 창업정신 되살리길

 산업화 초기에 창업을 했던 이른바 재벌 1세대와 달리, 사업을 이어 받거나 넘겨 받은 세대들은 대내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략컨설팅’이라는 경영 도구를 자주 활용했다. 대기업들은 그 컨설팅 결과를 바탕으로 사업구조와 포트폴리오 조정, 핵심 역량의 강화, 새로운 시장의 개척 등을 실행해 왔다. 하지만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컨설팅에도 적용이 되어 버린 것일까. 이제는 자신들의 미래를 컨설턴트들에게 맡기는 기업들이 줄고 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지금 대기업의 주요 인재들은 컨설턴트 못지 않은 지적 역량과 전략적 마인드를 지니고 있다. 오래 된 프레임을 갖고 현재의 시장 변동성과 환경 변화를 따라 잡지 못한다면 컨설팅산업 자체가 사양산업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의 위기 상황을 이겨 낼 묘수는 더 이상 없단 말인가. 새로운 단계와 차원의 혁신을 위해 창업 당시의 열정과 에너지를 복원해 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스타트업들과 한번 사귀어 보라는 것이다.

 기업강국 미국에는 비록 장수기업이지만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오랜 기간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들이 많다. 그 젊음의 비결 중에 하나가 바로 새로운 혁신의 에너지를 스타트업을 통해 공급 받는 것이다.

 실리콘밸리 뿐 아니라 미국의 동·서부 주요 도시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스타트업과 관련된 행사들이 열린다.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면 ‘도대체 왜 이런 기업의 이런 직책에 있는 사람이 여기에 왔을까’하는 의문이 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스타트업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장구한 역사를 지닌 대기업들의 주요 직책을 맡은 임원들을 숱하게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자세를 눈 여겨 보면 그저 호기심에 기웃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상당한 전문성과 사전 지식을 갖추고 눈에 불을 켜고 스타트업 창업가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 만남의 결과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대화가 있기에 대기업들의 인수합병도 자연스레 이루어지고 갑을 관계를 뛰어 넘는 전략적인 협력과 제휴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게 아닐까 싶다.

 연초에 한국에서도 스타트업과 열애에 빠진 기업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 홈쇼핑 기업의 색다른 신년회에 초대를 받아 다녀 왔다. 홈쇼핑을 하는 대기업이 다수의 벤처투자자들과 벤처생태계 관계자들을 초대한 이유를 참석해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행사는 그 기업이 투자하거나 제휴한 스타트업들을 소개를 하고 격려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공식적인 소개가 끝나고 네트워킹 시간도 가지면서 ‘이 회사는 스타트업과 연애를 하기 시작했구나’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행사를 주관한 담당 임원과 조직 구성원들은 벤처생태계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창업가들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미래 성장전략의 한 축으로 삼아 보려는 의지도 있었다. 단순히 여윳돈이 생겨서 투자해 주고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투자해 준 포트폴리오기업의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인력도 파견하고, 기술 지원과 마케팅 지원도 해 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반가운 점은 그 기업의 투자를 받은 창업가들이 그 기업과의 파트너십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마워한다는 것이었다. 갑과 을의 경계가 이미 허물어져 버린 채 양쪽 모두가 승자처럼 보였다.

 지금과 같은 역경의 시기에 전략보다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창업의 정신이다. 어떤 기업이든 시작했을 때의 마음이 있다. 그 초심을 다시 싹 틔우기 위해 스타트업과 열애 해 보기를 권한다. 좋은 만남이 되리라 믿는다.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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