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매거진M] 라미란이 당신을 무장해제시키는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연기의 본질은 가상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캐릭터에 대한 관객의 감정이 배우 본연의 인성이나 매력에 좌우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관객은 ‘국제시장’(2014, 윤제균 감독)을 보며 덕수(황정민)의 우직함과 달구(오달수)의 코믹함을 응원한다. 동시에 그것은 황정민의 치열함과 오달수의 너그러움에 대한 감응이기도 하다.

진상 라 과장부터 쌍문동 치타 여사까지

같은 맥락에서 보면 배우 라미란(41)의 가장 큰 미덕은 언제나 ‘자연스러움’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연기를 그럴 듯하게 잘한다는 의미의 ‘자연스러움’을 넘어선다. 라미란이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흔들며 아이돌의 섹시 댄스를 흉내 내거나(막돼먹은 영애씨), 음담패설에 가까운 농을 칠 때(스파이) 그것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천박함이나 상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히말라야’(2015, 이석훈 감독)에서 등반대의 홍일점 명애(라미란)가 “사실 나도 정상에 오르고 싶었는데 대장님은 항상 무택이를 택했어요”라며 오래 삭인 진심을 토해내는 장면은 자칫하면 과잉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라미란은 가녀린 감성으로 외줄타기하듯 인물에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캐릭터의 감정이 돌출되는 순간을 부드럽게 무마시키며 시나리오가 부여한 것 이상의 필연성을 부여한다.

기사 이미지

국제시장

라미란은 우악스럽지 않게 여성의 사적 리더십을 표현할 줄 알며(연애의 온도·미쓰 와이프), 때로는 남자들을 압도하는 근엄함을 발휘하기도 한다(국제시장). 그 모든 순간, 라미란 본연의 기품과 내면의 단단함에서 비롯된 여유는 스크린에 안정감을 부여하고 관객을 무장해제시킨다. 말하자면 자연스러움은 라미란의 아이덴티티다. 방송에서 남편이 ‘막노동’을 한다고 말하거나, 자신의 외모나 노출 연기를 농담거리로 삼는 대범함은 라미란의 이런 이미지를 견고히 했다.

든든한 맏언니이자 여장부, 만인의 친구

기사 이미지

미쓰 와이프

한편 라미란은 미세한 연기 리듬의 변주로 일상적인 장면에 의외성을 부여하고 관객의 시선을 붙들 줄 아는 타고난 코미디언이기도 하다. 가장 성공적인 건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시즌 12~, tvN)의 ‘순간 또라이’인 라 과장일 것이다. 그는 출근하자마자 빨간 립스틱부터 챙겨 바르고, 부하 직원에게 교묘하게 일을 떠넘기며, 법인카드로 살림을 장만한다. 뒷담화는 버릇이고 앞담화가 취미이며, 걸핏하면 사소한 걸로 삐쳐서 선물한 쿠폰을 돌려달라고 시비를 거는 여자다.

기사 이미지

막돼먹은 영애씨

누가 봐도 진상이지만 이런 라 과장을 연기하는 라미란을 지켜보는 건 대단히 즐겁다. 귀에 착착 감기는 맛깔스러운 말투, 변화무쌍하고 능청스러운 표정이 그렇다. 무엇보다 그의 연기는 라 과장의 얄미운 행동이 악의 없는 뻔뻔함에서 비롯됐다고 믿게 만든다. 캐릭터 자체도 현실에 있을 법한 여자일 뿐더러 그것을 설득력 있게 소화한다. 좋은 코미디는 정극을 기본으로 한다는 건 배우들의 단골 멘트다. 하지만 라미란만큼 이 명제를 연기로 구현해내는 배우는 드물다.

기사 이미지

응답하라 1988

라미란의 전력과 장기를 떠올리면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2016, tvN, 이하 ‘응팔’)에서 ‘치타 여사’ 라미란이 중견 여배우 그룹의 구심점이 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응팔’은 케이블 드라마의 시청률 단위를 바꿔 놓고, 사회·문화·경제적 파급 효과를 일으켰다. 하지만 시청자 입장에서 ‘응팔’에 감사한 것은 이 드라마가 이제 일일 연속극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생활 연기의 앙상블을 재현했다는 점이다. 숙련된 배우들이 일상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내면의 격랑을 힘 빼고 연기하는 모습을 찬찬히 주시할 수 있는 게 얼마 만인가.

라미란은 그중에서도 가장 역동적인 활약을 펼쳐보였다. 이웃들과 콩나물을 다듬으며 남편 흉을 볼 때의 수더분함부터 자식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는 친구에게 “그럼 너는? 네 인생은?” 하고 되물을 때의 묵직함, 시청자를 호흡 곤란에 빠뜨린 깨방정 댄스까지. 치타 여사의 다채로운 면모에 일관성을 부여한 것은 라미란이라는 배우의 아우라다. 극 중 어른들의 고스톱을 두고 아이들이 이런저런 예측을 내놓는다. ‘우리 아빠는 승부욕이 강하니까, 우리 아빠는 눈이 빠르니까’ 하는 식으로 저마다 근거를 대는 친구들에게 라미란의 아들 정환(류준열)이 말한다. “우리 엄마, 라미란이야.” 그걸로 충분했다.

한편 라미란은 (학생주임을 제외하고) 쌍문동 아이들이 별명을 부르는 유일한 어른이다. 든든한 맏언니이자 여장부, 만인의 친구, 어떤 장난이든 멋지게 받아칠 것 같은 재주꾼, 삶의 풍파에 꺾이지 않은 불굴의 어머니. 그것이 ‘응팔’의 라미란이고 그 이미지는 고스란히 배우 라미란과 중첩된다. 그가 실제로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한 것이든, 고도의 연기력이 불러일으킨 착각이든 그 결과는 흥미롭다.

‘여자 오달수’로 불린다는 것

대세 배우, 기승전 라미란, 라미란 이즈(is) 뭔들, 여자 오달수…. ‘응팔’ 이후의 세상은 라미란을 이렇게 부른다. 원래 ‘신스틸러’나 ‘명품 조연’으로 불리긴 했지만 그건 연기에 대한 상찬일 뿐, 상품성과는 무관한 수식이었다. 하지만 라미란은 이제 화면 밖에서도 배우 자체로 인지되는 ‘스타’이자 ‘브랜드’로 진화하고 있다.

기사 이미지

히말라야

할리우드의 여배우 수입은 34세를 기점으로 감소하는 반면, 남자 배우는 51세쯤에 정점을 이룬다는 통계가 있다. 구체적인 리포트는 없지만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영화의 캐스팅 1순위는 송강호·황정민·김윤석·이병헌 등 40대 후반 남자 배우다. 류승룡·유해진·오달수·곽도원·조진웅 등 개성파로 뒤늦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당당한 입지를 다진 배우도 있다.

하지만 40대에 전성기를 맞은 여배우, 미모 대신 개성과 연기력으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스타의 반열에 오른 여배우는 찾기 힘들다. 라미란이 ‘여자 오달수’로 불리는 것은 그가 오달수처럼 믿음직한 조연이며 호감형 배우라는 의미인 동시에, 여배우 중 비교 대상이 없는 새로운 타입의 배우라는 뜻도 담겨 있다.

‘드림걸즈’(2006, 빌 콘돈 감독)의 한 장면, 에피 화이트(제니퍼 허드슨)가 교태를 잔뜩 담아 남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말라깽이 디나(비욘세) 같은 여자가 좋아요, 아니면 ‘진짜 여자(Real Woman)’가 좋아요?” 지금 라미란이 한국영화 그리고 한국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 바로 이것 아닐까. 관객은 이미 답을 보냈다. 의심할 여지 없이, 흔쾌히.

이숙명 영화칼럼리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