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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원의 엄마' 송화숙씨, 74년만에 첫 여성 서울소년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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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여섯의 앳된 여선생님은 소년원 철문이 철커덩 열리자 움찔했다. 늦은 후회가 발목을 붙잡았지만 어느새 교탁 하나 사이에 두고 까까머리 아이들 앞에 섰다. “구…굿 모닝?” 조금 어설퍼 보이는 선생님이 우스운지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빨개진 선생님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1986년의 어느 봄날, 소년원 높은 담장 위엔 작은 꽃 하나가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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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서울소년원장으로 부임하는 송화숙씨.

풋내기 여교사는 31년 뒤 소년보호행정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됐다. 송화숙(57ㆍ여)씨가 15일 서울소년원장(고봉중ㆍ고등학교장)으로 부임한다. 서울소년원이 1942년 경성소년원으로 문을 연 이래 74년만에 탄생한 최초의 여성 원장이다. 법무부는 14일 ”송씨를 보호직 최초의 여성 고위공무원으로 승진ㆍ발령했다“며 ”30여년 공직생활 중 대부분을 소년원생ㆍ비행청소년의 재범방지와 성공적인 사회정착에 헌신해 온 공로를 인정했다“고 밝혔다. 서울소년원은 송씨가 영어교사로 86년 소년원 근무를 처음 시작했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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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소년원 전경.

경기도 의왕시에 위치한 서울소년원은 전국에 있는 10곳의 소년원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 원생만 250여명에 달한다. 서울소년원장(2급)은 지금까지 주로 행정고시 출신 공무원들이 맡았다. 송씨는 비(非)고시 출신이다. 86년 서울소년원 중등교사 경력채용(7급)으로 공직에 첫발을 들였다. 법무부 보호직 공무원 2109명 중 고위공무원(2급)은 남녀 통틀어 송씨를 포함해 단 5명이다. 5급 이상 여성도 27명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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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전북 익산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

송씨는 사범대학 졸업 후 81년부터 전북 익산의 한 시골 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초등학교까지만 의무교육이던 시절이었다. 가정형편 때문에 중ㆍ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송씨는 학생들이 낮에는 공장 등에서 일하고 밤에는 산업체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도록 도와줬다. 불우한 처지의 청소년들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소년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를 모집한다는 법무부의 채용공고를 보고 ‘이거다’ 싶었다. 부모님은 ”왜 멀쩡한 학교 그만두고 소년원 애들을 가르치려 하냐“며 반대했다. 하지만 딸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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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안양소년원 담임교사 시절 원생들과 생활관에서 찍은 사진.

소년원 교사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덩치가 산만한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대들 때는 솔직히 겁부터 났다. 군대 내무반처럼 딱딱한 경어체를 쓰는 교실 분위기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만 두고 싶은 적이 많았다. 하지만 표현은 거칠어도 순수한 마음씨를 지닌 아이들을 보며 마음을 붙잡았다. 선생님 속을 썩여서 미안하다며 소년원을 나갈 때 종이학 천마리를 곱게 접어 준 감성적인 남학생, 나중에 미용실 원장으로 성공해서 호강시켜 드리겠다던 당찬 여학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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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소풍에서 김영숙씨(오른쪽)와 함께.

송씨에게 김영숙(가명ㆍ43)씨는 특별한 인연이다. 송씨는 90년 안양소년원에서 김씨를 처음 만났다. 알콜 중독인 아버지에게 자주 폭행을 당했던 제자였다. 퇴원 무렵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김씨는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다. 송씨는 사비를 털어 김씨가 지낼 수 있는 방을 구해줬다. 후원자도 연결해 주고 야간고교에 다니도록 지원했다. 송씨의 배려 덕분에 김씨는 좋은 직장을 얻고 결혼도 하면서 성공적으로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어느덧 중년이 된 김씨는 송씨와 친자매같은 사이가 됐다. 최근 김씨와 송씨는 논산훈련소에서 신병교육 훈련을 마친 김씨 아들의 면회도 함께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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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운동회에서 원생들과 함께.

송씨는 95년 소년원 교사 생활을 마친 뒤 소년보호정책 전문가로 변신했다. 안산청소년비행예방센터 초대 센터장ㆍ서울남부보호관찰소장 등 법무부 범죄예방정책국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12년 7월부터 2년 반 동안에는 안양소년원장을 지냈다. 당시 매주 토요일마다 학생들과 함께 등산을 하면서 총 105번 관악산에 올랐다. 소년원에 있던 아이들 120여명과 거의 한 번씩은 함께 산에 오른 셈이다. 그는 “외출이 자유롭지 않았던 아이들이라 등산을 좋아했다”며 “적응에 힘들어 하다가도 등산 뒤 힘을 내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악기에 소질이 있는 학생을 발굴해 소년원에서 곧바로 음대에 진학시킨 것도 기억에 남는 일이다. 안양소년원은 송씨의 재직 기간 중 전국 소년원 중 최우수 기관으로 두 차례나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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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소년원장 재직 시절.

서울소년원장으로 첫 출근을 앞둔 송씨의 각오는 남다르다. 소년원을 나간 뒤에도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 원생들의 사후지도를 책임지는 ‘희망도우미 프로젝트’, 중증 정신질환을 겪는 아이들을 위한 전문 심리치료 프로그램 등을 도입할 계획이다. 하지만 잘 짜인 시스템보다 중요한 건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일이라고 송씨는 말한다.

“살면서 누구나 넘어져요. 한번도 다쳐본 적 없이 반듯하게만 걸어서 삶을 마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실수로 넘어졌던 아픔를 딛고 일어서기 위해 맑은 아이들은 고단한 삶을 짊어져야 한답니다. ‘원장’이 아닌 ‘엄마’로 아이들의 짐을 덜어주고 싶어요.”

장혁진 기자 analo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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