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클로즈업] 동화 읽어주는 남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4면

ID:가영아빠

본명:류증희

나이:31세

가족:아내 신미경(32)씨와 딸 가영(3).아들 재욱이(1)

젊은 아빠 류증희(경기도 안양시 호계동)씨는 기자가 집을 찾은 그날도 그림책을 읽고 있었다. 가영이가 들고온 '수수께끼 여행'을 진지한 목소리로 읽어주는 그에게서 학생운동에 몰두하던 청년의 모습을 찾기는 어려웠다. 한때 그에겐 '운동'이 전부였다. 서울대 정치학과 91학번인 그가 군입대까지 미루며 대학을 6년 만에 졸업한 것도 그 때문이다. 서울대 '대학신문'에서 3년, 좌파 계열의 '대학생 신문'에서 다시 3년 동안 일하면서 당시 연인이었던 지금의 아내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

"약속시간을 얼마나 어겼던지…. 전 굉장히 일 중심적인 사람이었어요. 저 자신에게도, 동료들에게도 개인사정 같은 건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그림책 아빠'가 됐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가영아빠'라는 이름으로 그림책 서평을 숱하게 올려 독자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 상도 받았다. 선배 부부와 함께 만든 홈페이지 '가영이랑 은수랑'(kidsbook.co.to) 에도 그림책 이야기가 가득하다. '사과가 쿵'이니 '누구야 누구'니 쉴새없이 그림책 얘기를 하던 그에게 '그림책 말고' 요즘 읽은 책을 물었더니 한참을 머뭇거린다. "어… 최재천 선생님 책하고, 어… 러시아 혁명사…." 머쓱한 미소다.

2001년 5월. 가영이가 갓 돌을 지났을 무렵, 공군 학사장교로 군복무 중이던 류씨는 혈변 (血便) 을 쏟으며 쓰러졌다. 아내의 둘째아이 임신 소식에 마냥 들떠 있을 때였다. 24시간 3교대로 지하벙커에 근무하면서도 피곤을 잊을 만큼. 비장이 부어오른 것도 모르고 "요즘 배가 나오네" 하며 행복하게 웃었고, 잇몸에서 피가 나와도 "좀 피곤한가봐"하며 넘겼던 것이다. 만성골수성 백혈병. 제대 한달 전이었다.

"믿기지가 않았어요. 가족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임신 중인 아내에게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방사선 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져가고, 불안으로 예민해지면서 결국 아내를 괴롭히고 말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 가시가 돋았다. 지금도 미안한 일이다.

2001년 10월 18일. 류씨가 여동생(25)의 골수를 받아 다시 태어난 날이다. 새 생명에는 새 마음이 깃든다.

"예전에는 '명분'과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이제는 '우리 아이'가 가장 중요합니다. 한사람의 행복이 결국 전체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거지요. 매일 살을 부대끼고 사는 가족과의 시간이 가장 소중합니다."

골수 이식수술 뒤 6개월 동안은 감염을 피하기 위해 외출을 삼가야 한다. 집에서 하루종일 아이와 지내면서 하루에 열권씩 그림책을 읽어줬다. 책과 함께 아이에 대한 사랑도 쌓여갔다. 가영이가 그림을 보며 내용을 욀 정도로'고릴라'를 좋아하자, 동물원 나들이에 나섰다. 화창한 5월에 수술용 하늘색 마스크에다 모자까지 쓴 그를 사람들이 힐끔거렸지만, 진짜 고릴라를 보고 마냥 즐거워하는 가영이를 보고 그도 기뻤다. 둘째 재욱이가 태어나던 날도 마스크를 쓰고 병원에 가서 탯줄을 손수 잘랐다.

"감염 위험 때문에 재욱이 똥기저귀는 못갈아줬다"며 미안해하는 그에게 아내는 "시댁에서 아실까봐 걱정될 정도로 집안일을 많이 도와준다"며 미소 지었다.

지난 가을부터 류씨는 한국백혈병환우회의 월간 소식지를 만들고 있다. 얼마전부터는 사회 운동에 복귀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가족을 잊을 정도로 일에 몰두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땐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고 싶어요."

이제 그는 제대 직전에 병으로 쓰러진 불운을 "나라에서 매달 연금이 나오니 복권 맞은 거나 같다"고 할 만큼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우리 가영이 시집가는 거 보고 죽는 게 꿈이예요"라는 그의 말 속엔 재발에 대한 불안이 숨어 있었다. 그런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아내는 "부부가 함께 두 아이를 키울 수 있었던 건 축복이예요. 아이들한테는 평생 가장 큰 선물이 될 거예요"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퍼졌다.

구희령 기자
권혁재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