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건파일] 일당 100만원에 현혹돼 보이스피싱 조직 가담한 중학생

중앙일보

입력

기사 이미지

차씨가 이군에게 내린 `수거 지시` 카카오톡. [사진제공=방배경찰서]

일층 비밀번호는 OOOOO. 빨리 움직여요”

지난달 25일, 드디어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중학생 이모(16)군의 발걸음이 바빠졌습니다. 대구에서 당일 버스를 타고 올라온 이군이 향한 곳은 연고도 없는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한 아파트였습니다.

이군이 대구에서 이곳까지 온 건 ‘일당 100만원’ 때문이었습니다. 동네 PC방에서 알게 된 중국동포 주모(17)군이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수거해오면 일당 80~150만원을 주겠다”고 제안한 겁니다. 이군은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고, 마침내 지금 첫 ‘작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주군이 소개해 준 보이스피싱 조직원 차모(21)씨의 지시로 이곳까지 온 겁니다.

아파트에 들어서는 이군. [영상제공=방배경찰서]

차씨가 알려준 대로 비밀번호를 누르자 아파트 일층 문이 열렸습니다. 이제 4층과 5층 계단 사이에 걸린 초록색 봉투를 들고 오면 작전은 끝이 납니다. 지시대로 초록색 봉투를 잡은 이군. 그런데 난데없이 여기저기서 경찰이 나타납니다. 미리 피해자의 신고를 받고 이곳에 잠복해 있던 겁니다.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에 가담한 철없는 중학생들이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서울 방배경찰서는 보이스피싱 조직에 가담해 사기전화에 속은 피해자의 돈을 가로채려 한 혐의(절도미수 및 주거침입)로 이군 등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12일 밝혔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먼저 범행을 기획한 건 차씨였습니다. 중국동포로 보이스피싱 조직원이었던 차씨는 사기전화 피해금을 수거해 올 ‘수거책’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고, 동네 PC방에서 알게 된 같은 중국동포 주군에게 접근했습니다. 수거책을 모집해오면 한 명 당 20만원을 주겠다고 약속한 겁니다.

주군은 동네 PC방에서 안면이 있던 이군에게 접근한 뒤 이군의 친구 박모(16)군마저 꾀었습니다. 이렇게 중학생들이 가담한 보이스피싱 조직이 탄생했습니다. 이군은 서울 지역을, 박군은 대구·대전 지역을 맡는 등 ‘담당구역’도 정했습니다.

먼저 지시를 받은 이군. 불안하고도 설렌 마음으로 서울에 왔지만 범행은 단번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앞서 같은 조직으로부터 온 사기전화에 속아 1억400여만원의 피해를 본 피해자 정모(68·여)씨가 미리 경찰에 신고를 했기 때문입니다.

경찰에 따르면 해당 조직은 지난해 12월 정씨에게 "금융감독원 직원인데 당신의 개인정보가 유출됐으니 예금인출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계좌에서 돈을 빼낸 뒤 집에 숨겨두라"고 했습니다. 정씨는 이를 그대로 따랐다가 돈을 세 차례나 절도 당했습니다. 보이스피싱 범죄가 무엇인지 잘 몰랐던 정씨는 이들에게 아파트 비밀번호까지 알려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경찰은 이군을 현행범으로 체포하고 다른 범행을 준비 중이던 주군과 박군을 입건했습니다. 또 이들에게 범행을 지시한 혐의 등으로 차씨를 구속하고 다른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중학생이 보이스피싱 범행에 가담해 입건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습니다. “최근 지연 인출제도 등 여러가지 예방책이 실시되면서 보이스피싱 조직들이 피해자들에게 돈을 빼내는 수법도 계속 변하고 있다”며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습니다.

공다훈 기자 kong.daho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