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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사법 전도사' 김상준 부장 법원 떠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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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함께 했던 식구들과 일일이 악수하는 김상준 부장판사 [서울고등법원 제공]

‘치료사법 전도사’ 김상준(55ㆍ사법연수원 15기)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5일 법원을 떠났다.

1989년 법관이 된 김 부장판사는 재직기간 동안 법원에 신문물을 전파하는 개척자 역할을 해왔다. 치료사법 실험이 대표적이다. 정신질환으로 인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재판기간 중 6개월 가량의 치료의 기회를 부여한 뒤 그 경과를 살펴 개선가능성이 높은 이들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해 사회복귀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구속 수감된 피고인들에게 치료 기회를 줄 수 있는 제도적 창구가 없는 상태에서 김 부장판사는 일반적인 ‘보석제도’를 실험에 활용했다. 보석은 일정한 조건을 전제로 구속된 피고인을 석방해 자유로운 상태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제도다. 김 부장판사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보석의 조건으로 돈(보증금)이 아닌 ‘치료’를 걸었다. ‘김상준 모델’로도 불리는‘치료조건부 보석제’다.

김 부장판사는 2000년 부산지방법원 재직 시절 처음 치료조건부 보석을 허용한 자신이 맡은 형사재판에서 이 실험을 계속해 왔다. “죄에 상응하는 처벌도 중요하지만 범죄의 원인이 된 병을 치료하는 것이 근원적 처방”이라는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 김 부장판사는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내린 4건의 판결을 포함해 지난해에도 치료 조건을 성실히 이행한 18명에게 사회복귀의 길을 열어줬다.

지난해 치료감호법 개정으로 올해 12월2일부터 판사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피고인에게 선고유예나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자비로 특정한 치료를 받을 것을 명령할 수 있는 ‘치료명령제도’가 시행된다. ‘김상준 모델’의 취지가 제도화된 것이다.

김 부장판사는 주먹구구식이었던 법원의 ‘재범가능성’ 평가의 과학화에도 기여했다. 판사가 ‘재범가능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범죄의 양형이 크게 달라지고, 강력범죄자들에 대한 전자발찌 부착 여부나 성범죄자에 대한 화학적 거세 처분 여부가 결정된다. 김 부장판사는 대전고등법원 재직시절인 2007년 한 재판에서 ‘사이코패스’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심리검사인 PCL-R 테스트를 적용했다. PCL-R 테스트를 국내 재판에 적용한 첫 사례였다. 김 부장판사는 “영문으로 된 테스트를 피고인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번역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기억했다. 최근에는 살인범 김하일ㆍ박춘풍 등의 재판에서 뇌 영상 촬영결과를 재범가능성 평가의 보조적 근거자료로 활용하는 등 뇌 과학분야의 성과들을 재판과 접목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김 부장판사는 이날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청사 로비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뇌 과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올리버 색스의 뉴욕타임즈 기고를 인용해 퇴임사를 했다. 지난해 8월 올리버 색스가 암으로 사망하기 넉달 전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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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지 않다곤 못 할겁니다.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이 가장 큽니다. 나는 사랑했고 또 사랑 받았습니다. 많은 것을 받았고 또 일부는 되돌려줬습니다. 나는 읽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세상과 소통했고 특히 여러 작가 독자와 소통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의식있는 존재, 생각하는 동물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조차 내게는 크나큰 특권이자 모험이었습니다”

김 부장판사는 “27년간 많은 사랑과 배움을 얻었고 또 일부는 돌려줬습니다…(중략) 여러분과 함께 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마음껏 재판하고 깨어 고민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것은 특권이자 삶의 향연이었습니다”고 말했다.
임장혁 기자ㆍ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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