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근 회장 “피아노·칠판 기부는 우물 파는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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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근 부영그룹 회장(가운데)은 필리핀 어린이들에게 디지털 피아노와 칠판을 기증한 뒤 “한국이 전쟁 폐허를 딛고 성장한 원동력이 인재 양성이었음을 필리핀 사람에게 전파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부영그룹]

지난달 29일(현지시간)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 있는 필리핀 국군회관 테제로스홀. 키가 1m20㎝나 될까. 그레고리아초등학교 5학년 바라이스(12)는 자신의 키만한 디지털 피아노 앞에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필리핀 학교에 5000대, 5만 개 보내
“한 나라 성장의 밑거름 되는 투자”
12년간 18개국에 5000억대 기부

바라이스는 “지난 두 달 동안 오늘을 위해 ‘아리랑’을 맹연습했다. 이젠 멜로디를 전부 외웠다”고 말했다. 태극 색깔이 뒤바뀐 태극기를 가리키며 “깃발도 직접 그렸다”고 자랑했다.

이날 부영그룹은 필리핀 초·중등학교에 디지털 피아노 5000대와 교육용 칠판 5만 개를 기증했다. 바라이스를 포함한 60명의 피아노 합주에 맞춰 100여 명의 어린이 합창단이 ‘아리랑’과 ‘졸업식 노래’ ‘고향의 봄’ 등 한국 노래로 방문단을 환영했다.

아이들이 서툰 한국어로 “나의 살던 고향은…”을 열창할 때는 진지함마저 묻어났다. 기증식에는 아민 리스트로 필리핀 교육부 장관과 김재신 주필리핀 대사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행사장에서 만난 이중근(75) 부영 회장은 교육 기부를 ‘우물 파기’에 비유했다. “어릴 적 고향 사람들과 우물물을 나눠 마시고 자랐어요. 교육 기자재 기부는 우물을 파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 나라의 성장 밑거름이 되는 제일 가치 있는 투자가 교육이니까요.”

이 회장은 2004년부터 최근까지 베트남·라오스·르완다 등 18개 나라에 디지털 피아노 6만여 대, 칠판 60만 개를 전달했다. 누적으로 5000억원대에 이르는 ‘통 큰’ 기부다.

사업차 베트남을 찾았다가 우연히 현지 학교의 열악한 사정을 보고는 칠판을 지원한 게 계기가 됐다. 기부를 보다 체계화하기 위해 한때 디지털 피아노 제작업체 인수도 검토했다고 한다.

디지털 피아노에는 ‘졸업식 노래’ ‘아리랑’ 같은 우리 노래가 저장돼 있다. 피아노가 보급된 학급당 학생이 50~70명인 것을 감안하면 매년 300만 명 넘는 외국 어린이들이 한국 문화와 친숙해지는 셈이다.

부영은 베트남에서 주택 사업을 진행하고, 라오스에선 골프장을 경영하고 있다. 필리핀은 전혀 연고가 없는데 선뜻 기부를 결정한 사연은 무엇일까.

이 회장은 자신의 저서 『6·25전쟁 1129일』 영문판을 가리켰다. 1950년 6·25 전쟁 발발부터 53년 7월 27일 휴전까지를 기록한 책이다. 이 회장은 “필리핀은 아시아 국가 최초로 우리와 수교했고, 6·25 전쟁 때는 7420명을 파병했다”며 “한국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성장한 원동력이 인재 양성이었음을 필리핀인들에게 전파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날 기증식에서는 한국 대학(원)에 다닐 때 우정(宇庭)교육문화재단 장학금을 받았던 필리핀 학생들이 통역과 사회를 맡았다. 우정은 이 회장의 아호다. 그는 “2010년부터 외국인 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는데 수혜자가 800명쯤 된다. 이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엘리트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대견하다”며 웃었다.

마닐라=이상재 기자 lee.sangja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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