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외국인 적대적 M&A 어떻게 봐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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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외국인 주주는 국내 기업에 과연 무엇인가. 주가를 올려 자금 조달을 쉽게 하고 경영을 보다 투명하게 만드는 고마운 존재인가. 아니면 수십년 동안 일군 기업의 자산을 단번에 빼앗아갈지도 모를 위협적인 존재인가.

김진표 경제부총리와 이정재 금융감독위원장이 내린 답은 이렇다. "그냥 주주일 뿐이다. 자본에 내.외국인 국적 구분은 무의미해졌다. 차별적 대우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SK그룹의 지주회사격인 SK㈜가 영국계 투자회사인 소버린자산운용으로부터 사실상 적대적 인수.합병(M&A) 공격을 받자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재계는 이 같은 M&A를 방어하기 위해서도 재벌에 대한 규제를 완화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달라진 외국인=국내 상장기업에 대한 외국인의 적대적 M&A가 완전 허용된 것은 1998년 5월. 그로부터 5년 사이 코스닥시장의 작은 기업들을 상대로 한 적대적 M&A는 더러 있었지만 대기업을 표적으로 한 것은 SK㈜ 건이 처음이다.

소버린자산운용도 지난 4월 금융감독원에 SK㈜ 주식의 대량 보유를 신고하면서 투자 목적은 시세차익을 위한 '일반 투자'라며 M&A 의도는 부인했다. 그런데 SK㈜가 지난달 채권단과 SK글로벌 지원에 합의하자 소버린은 SK㈜의 경영진을 교체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소버린의 수석 운영 책임자인 제임스 피터는 7일자 미국 비즈니스위크와 인터뷰에서 "소버린의 목표는 SK㈜의 현 경영진을 퇴출시키고 부실한 SK그룹 계열사들과의 재무적 관계를 끊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주주로서 권한을 행사해 경영진을 바꾸는 게 곧 적대적 M&A다. 소버린의 이번 적대적 M&A가 성공하면 대기업에 대한 국내 첫 사례가 될 것이며, 머지 않아 다른 대기업들로 파급될 가능성이 있다."(안용수 대신증권 상무)

소버린은 지난 4월 약 1천8백억원을 들여 SK㈜의 지분 14.99%를 매입한 뒤 더 이상 사들이진 않았지만, 다른 외국인들이 계속 매입하고 있어 소버린과의 연합전선 형성 여부가 주목된다.

적대적 M&A, 어떻게 봐야 하나=정부와 학계에선 순기능이 크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미 완전히 열어놓은 상태에서 다시 막을 방법이 없다는 현실론도 있다.

"기존 지배주주의 횡포를 막고 기업 가치를 높이기 위해선 적대적 M&A만큼 좋은 수단이 없다. 국내 투자자들은 아직 자금 여력이 크지 않고 부정적인 여론의 눈치도 보느라 선뜻 나서지 못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외국 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연강흠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적대적 M&A라는 강력한 시장 규율을 통해서만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할 수 있다. 외국 자본을 적대적 M&A에서 차별한다면 자본시장을 통한 시장 규율을 기대하기 힘들다."(박영석 서강대 경영대학 교수)

"누가 되었든 투명하고 책임지는 경영을 하는 게 중요하다. 경영 주체의 국적에 지나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장하성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

이 같은 견해에는 정부도 동조한다.

"주주권은 한국의 법령에 따라 정당하게 보호받는다. 국적은 의미가 없다.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2만달러를 향해 가기 위해서도 외국 자본의 역할은 계속 커져야 한다."(김석동 금감위 감독정책 1국장)

재계 쪽에서도 적대적 M&A에 드러내 놓고 반대하진 않는다. 다만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중심으로 출자총액제한이나 계열 금융회사의 의결권 제한 등 규제를 완화해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달라고 요구한다.

"M&A가 글로벌 스탠더드로서 시대적 대세라는 점은 인정한다. 이미 지분의 50% 이상을 확보한 외국인에 대항해 주식을 사들이는 것도 무의미할 뿐더러 그럴 돈도 없다. 외국인 주주들과 협력해 합리적인 주주 중시 경영을 할 따름이다. 하지만 차제에 M&A 시장에서 국내 기업이 역차별당하는 것은 시정됐으면 한다."(삼성그룹 관계자)

재계에선 출자총액제한을 풀기 힘들다면 ▶지주회사 설립 요건을 완화하거나▶유럽이나 캐나다처럼 적대적 M&A에 직면할 경우 기존 주주들이 저가(低價)의 신주 발행을 통해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서도 이사회가 적대적 M&A를 저지하기 위해 합리적 방어 조치들을 취할 수 있도록 길을 열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방어 행위를 획일적으로 금지하고 공격하는 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하도록 제도가 만들어져 있다."(송종준 충북대 법대 교수)

시민단체인 대안연대에선 국내외 자본을 결코 똑같이 보아선 안된다는 견해도 내놓는다.

"외국인은 단기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장기 투자보다 단기 배당을 요구하면서 기업의 성장 잠재력을 약화시키기 쉽다. 한국 경제의 성장 메커니즘을 복원하기 위해서도 국내 대기업에 실질적인 경영권 방어 수단을 주어야 한다."(대안연대 정승일 정책위원)

하지만 정부 입장은 단호하다. 계열사들을 동원한 선단식 그룹 경영을 다시 허용할 수 없으며, 개별 기업 단위로 대주주가 주식을 더 사모으든 자사주를 매입하든 알아서 자구책을 찾으라고 주문한다.

김광기 경제연구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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