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속의 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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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호 34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집, 그러니까 내 아지트인 ‘물 속의 달’은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 있다. 큰길에서 가깝지만 골목으로 들어서 모퉁이를 두 번 정도 돌아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모퉁이를 두 번 도는 동안 공기가 달라지고 시간의 흐름도 느려진다. 마치 영화 ‘화양연화’에서 모완과 리첸이 국수를 사기 위해 지나가던 골목처럼 그곳에서는 모든 동작이 느려진다.


‘물 속의 달’에는 간판이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문에서 좀 떨어진 벽의 하단 무릎 높이에 문고판 크기의 철판이 있고 그 위에 ‘물 속의 달’이라는 글자가 윤명조 720 서체로 새겨져 있어 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치나 크기는 그렇다 해도 조명마저 어두워 간판이라고 하기에는 떳떳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곳의 손님은 대부분 단골이다. 위치도, 간판도,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외관도 아무나 지나가다 들어오기는 어려운 술집이다. 나도 여기를 발견하고 한 달이나 망설인 끝에 들어갔으니까.


‘물 속의 달’의 장점은 많지만 우선 인테리어가 마음에 든다. 블랙과 화이트만으로 색을 절제했고 조명 역시 최소한으로 사용해 처음엔 너무 어두운 것 아닌가 싶지만 시간이 갈수록 차분하고 그윽한 공간이란 걸 알 수 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사진이 든 액자 같은 소품들도 있지만 눈에 띄는 것은 아주 큰 스피커들이다.


술집은 주인이 중요하다. ‘물 속의 달’처럼 주인 혼자서 일하는 곳이라면 주인의 성품이 술집 분위기를 결정한다. 이곳 주인은 무심해 보이는 얼굴의 60대 남자다. 친절하지도 퉁명스럽지도 않다. 손님에게 자꾸 말을 시키거나 하지는 않지만 이쪽에서 말을 걸면 대답을 곧잘 한다. 그것도 매번 다르게 말이다. 가령 나는 몇 번인가 그에게 가게 이름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다. ‘월인천강지곡’에서 따왔다고 했다가, 위스키 ‘언더락’을 낼 때 카빙을 해서 ‘온더볼’이라는 둥근 얼음을 사용하는데 그 원형 얼음이 잔 속에 담긴 모습이 꼭 물 속의 달처럼 생겨서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가,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라는 책에 ‘물 속의 달’이라는 술집에 대한 에세이가 나오는데 거기서 따온 이름이라고도 했다. 어떤 때는 그저 ‘달 속의 물’보다는 낫지 않으냐고 웃었다.


주인의 웃음처럼 음악도 마음에 든다. 여기는 재즈만 튼다. 가게 한쪽 벽면을 재즈 음반으로 꽉 채웠다. 주인은 가끔 음악에 동작을 맞추기도 한다. 특히 오스카 피터슨의 ‘nica’s dream’ 같은 곡이 나올 때면 마치 자신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열 손가락으로 허공의 건반을 쾅쾅 두들긴다.


가끔 사람을 육신으로 만나고 싶을 때도 있다. 약속을 정해 만나려고 하면 쉽지 않다.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동선을 맞추어야 한다. 무엇보다 두 시간 이상을 함께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포기하고 만다. 그럴 때 아지트가 필요하다. ‘물 속의 달’ 같은. 장소는 정해져 있으니까 시간 날 때 언제든 가면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주인만큼이나 손님도 중요하다. 가게는 주인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곳을 드나드는 손님들의 성품과 문화와 취향이 섞인 공간이다. ‘물 속의 달’이란 이름 때문일까, 이곳의 단골 손님은 대체로 고요하다. 대화를 해도 시끄럽게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혼자 와서 책을 읽거나 뭔가를 쓰거나 그리거나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신다.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눈인사를 한다. 대화를 원하면 말을 걸 수도 있다. 나직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러다 다시 혼자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혼자지만 함께 있는 시간. 함께 지만 혼자 있는 시간. 아지트는 그런 시간을 누리는 공간이다.


한가지 단점이라면 ‘물 속의 달’에는 안주를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콜릿이나 크래커, 치즈 같은 것도 없다. 배고픈 사람은 이곳에 오면 안 된다. 와도 되지만 먹을 게 없다. 먹을 거라곤 술뿐이다. 재즈뿐이다.


‘물 속의 달’이란 술집은 없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에 나오는 것처럼 그저 상상 속의 술집이다. 오웰처럼 나도 한번 상상해본 것이다. 어쩌면 그런 이름의 술집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상상하는 그런 아지트는 아닐 것이다. ●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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