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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이상 비밀이 지켜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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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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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런던특파원

음악가이자 작가·배우이면서 풀타임 제다이 기사를 자처하는 이의 주장을 소개하려고 한다. 데이비드 그라임스다. 본업은 옥스퍼드대 물리학 박사이자 연구원이니 얼토당토않진 않을 게다.

물리 현상이 떠오를 수 있겠다. 그러나 아니다. 최근 논문 제목이 ‘음모론의 생존력’이다. 특정 기관이나 세력이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할 때, 즉 음모를 꾸밀 때 얼마나 비밀이 유지될 수 있는가에 대한 탐구다. 사회심리적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라임스는 수학을 들이댔다.

L=1-e-??. 도입부에 등장하는 식인데 이게 그나마 제일 간단한 모양이다. 함수 그래프도 등장한다. 고교 수학 과정을 무사히 마친 사람들의 눈에도 영락없는 외계어다.

그래도 안도하시라. 결론은 이해 가능한 범주 내에 있다. 그의 계산으론 “1969년의 달 착륙은 없었다”는 유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3년8개월 만에 드러난다고 했다. “소아 백신이 유해한데도 미국 정부와 세계보건기구가 숨기고 있다”는 음모론도 두 기관이 제 아무리 비밀을 유지하고 싶어해도 그게 진실이라면 3년2개월 후엔 들통이 난다고 했다.

관련자들의 숫자 때문이다. 관련자들이 2521명이 넘어가면 5년 이상 비밀이 유지될 수 없고, 1000명 이내여야 10년을 간다고 했다. 공모자가 125명 이내여야 100년을 버틸 수 있다고 했다. 에드워드 스노든에 의한 미 국가안보국(NSA)의 도청 폭로를 떠올리면 되겠다. 결국 달 착륙이나 백신 음모론 모두 사실이 아니란 얘기다.

‘세상은 수학이다’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수학 언어만이 현실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그라임스도 오지랖이 넓은 이들 중 한 명이다. 그래도 음모론에까지 수학을 들이대는 게 독특했는데 그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이 비합리적이거나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그래도 말이 안 되는 데도 믿는 경우가 있다. 백신 음모론처럼 자신에게 유해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이 같은 반과학적 믿음을 재고할 수 있게 돕고 싶었다. 내 주장이 (생각을 바꾸는) 확신까진 주진 않을 수 있다. 음모론은 합리성에 기초하지 않은 이데올로기적 허구여서다.”

얼마 전 천안함 좌초설을 주장한 이에 대한 1심 판결이 났다. 2010년 3월 이후 폭침설을 부인하는 주장들로 사회가 뒤흔들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일부는 이번 판결도 여전히 믿지 않을 게다. 그라임스 박사의 논문을 내밀면 좀 먹히려나.

고정애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