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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 아파트, 반값 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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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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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세게 한 방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집을 이렇게도 지을 수 있구나, 콜럼버스의 달걀을 만난 것 같았다.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올해 수상자로 선정된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 얘기다. 아라베나는 2003년 칠레 북부 항구도시 이키케 슬럼가에 ‘반쪽 아파트’ 100가구를 지었다. 가구당 국가보조금 7500달러(약 900만원)가 들어갔다. 부엌·침실 등 기본 설비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입주자가 조금씩, 조금씩 채워가는 집이다. 한 차례로 끝난 실험이 아니었다. 칠레를 넘어 멕시코까지 13개 도시, 2500가구로 확산됐다. 유럽 난민 주거 문제를 푸는 방편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갑작스레 우리 현실이 떠올랐다. 청춘을 다 바쳐도 아파트 한 채 마련하기가 힘겨운 시대다. 아라베나가 2014년에 한 TED 강연을 유튜브에서 돌려봤다(※한국어 자막도 있다). 실마리는 대화였다. 제한된 부지에 100가구를 수용하려면 작고, 높게 지을 수밖에 없었는데, 정작 주민들은 단식투쟁도 불사하겠다고 했다. 작은 아파트는 확장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라베나는 입주자와 머리를 맞댔다. 해답은 빈민가 자체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작은 집을 짓는 대신 큰 집의 반을 짓자고 제안했다. 토론에 토론을 거쳤다. 주민들도 설계부터 시공까지 모든 공정에 동참했다. 층수를 낮추는 대신 평수를 늘릴 수 있는 ‘반쪽 아파트’는 이렇게 탄생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는 중산층 주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아라베나가 수상 직전 디자인 웹진 ‘디진(Dezeen)’과 한 인터뷰가 인상적이다. 그는 남의 어려움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강조했다. “건축가는 흔히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을, 자기의 언어로만 들으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에게 답안이 아닌 문제를 물어본다”고 말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자기 말만 앞세우는 게 우리의 자화상이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상대방 흠집 내기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 예전 대선 정국에서 표만 의식했던 ‘반값 아파트’도 기억난다. 두 다리를 쭉 펴고 잘 집을 구할 수 없어 아이를 못 낳겠다고 하는 요즘 신혼부부들, 그들에게 ‘반쪽 아파트’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작다.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나, 정답은 현장에 있다. 우리 젊은이의 고충부터 경청해 보자. 부산 기장군을 출산율 1위로 만든 것도 ‘반값 전세’였다.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