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표직 물러난 문재인과 더민주의 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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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표가 27일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그동안 비주류의 거센 사퇴 공세에도 대표직을 고수해오던 그는 안철수 의원의 신당 창당으로 코너에 몰리자 여권 원로 김종인 전 장관을 영입해 지휘봉을 넘기고 평당원으로 돌아왔다. 야당은 계파갈등과 분열을 거듭해온 탓에 지난 15년간 무려 40번이나 대표가 바뀌었다. 지난해 2·8 전당대회에서 45% 넘는 득표율로 선출된 문 대표 역시 1년을 넘기지 못한 채 물러났다. 당원들의 표심 대신 계파 간 권력투쟁에 리더십이 좌우되는 야당의 후진성을 또 한 번 보여준 것이다.

야권 분열 막지 못해 중도 하차
인재영입 등 혁신 노력은 긍정적
사퇴 계기로 수권정당 거듭나야

문 대표는 취임 직후엔 ‘민생·안보 정당’을 선언하고 이승만·박정희 묘소를 참배하는 등 달라지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당의 고질병인 계파갈등 해소에 실패하면서 리더십에 이내 한계를 드러냈다. ‘혁신’을 외치며 내홍을 수습하려 애쓰면서도 “공천지분 얻으려는 사심집단” 같은 발언으로 비주류의 반발을 산 끝에 당이 쪼개지는 참사를 막지 못했다.

문 대표가 사퇴 직전 주도한 인재영입과 노영민·신기남 의원 공천 배제 등이 좋은 반응을 얻으며 더민주의 지지율이 반등한 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더민주가 갈 길은 멀다. 야권이 지금처럼 분열된 상태로 4·13 총선을 치른다면 참패할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 문 대표가 좀 더 일찍 물러나는 용단을 내렸다면 분당 사태를 막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문 대표의 사퇴를 계기로 더민주는 진정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제1 야당이 지리멸렬하면 나라의 미래는 없다. 건강한 민주정치를 위해선 건전한 수권 야당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더민주가 보여준 행태는 그런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국회에선 막무가내식 반대와 장외투쟁으로 일관했고, 당내에선 계파 간 갈등으로 19대 국회 4년을 흘려 보냈다. 더민주는 대통령의 불통과 여당의 독주를 탓하지만 의석 300석 가운데 109석을 차지한 거대 야당이 4년 내내 기억나는 정책 하나 제시하지 못한 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직무유기다. 문 대표 사퇴에도 불구하고 더민주는 아직은 국민의 신뢰를 되찾는 데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문 대표는 자신의 사퇴가 야권 통합의 밀알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더민주는 국민의당과 야권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이 불가피해 느슨한 연대조차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모질게 돌아선 호남 민심을 추스르기도 쉽지 않다. 이런 가운데 문 대표는 총선 결과에 무한책임을 지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만큼 더민주의 총선 성적이 신통찮을 경우 문 대표는 야권 분열의 원인 제공자란 비난을 면하기 힘들 것이다.

문 대표와 더민주가 살길은 하나다. “당이 이기려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 대표의 고별사 그대로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도 개혁 수권 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이 최선이다. 문 대표 역시 말 그대로 백의종군하며 당 운영에 일절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측근들도 마찬가지다. 더민주 내에서 ‘친노’니 ‘패권주의’니 하는 말 자체가 사라질 때에야 다른 야권 세력과의 연대도 명분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