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헬로비전 인수 험악한 여론전, 미래 먹거리 고민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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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희 경제부문 기자

미래창조과학부는 최근 e메일 계정 두 개(kimchangshik@msip.go.kr과 competition@msip.go.kr)를 새로 열었다.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의 인수·합병에 대한 국민 여론 수렴용 계정이다. 미래부는 “이번 M&A가 전례없는 통신사업자와 방송사업자 간 결합이어서 의견을 폭넓게 듣고 반영하기 위해 이같은 절차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미래부의 조치에는 정책 결정의 어려움이 묻어난다. SKT의 CJ헬로비전 인수는 시장참여자들의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갈리는 문제여서다. ‘방송·통신 융합에 따른 성장동력 확보’라는 SKT와 ‘독과점 심화’라는 KT·LG유플러스 연합군은 한치 양보 없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동원되는 논리도 한쪽 손을 선뜻 들어주기 어렵다. 지난해 통신 3사의 매출은 한 해 전에 비해 모두 내리막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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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통시장 1위인 SKT도 창사 이래 처음으로 매출감소를 걱정할 정도다. 통신 3사 모두 ‘통신 이후의 먹거리’ 확보가 발등의 불인 것이다. 더구나 ICT(정보통신기술) 생태계에서 구글·애플 같은 글로벌 플랫폼 운영 기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국내 통신사업자의 입지는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CJ헬로비전 인수를 결정하면서 “방송·통신을 결합해 국내 콘텐트 산업의 판 자체를 키워보겠다”는 SKT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해외에서도 통신·방송 기업들이 활발하게 M&A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 AT&T와 디렉TV, 스페인 텔레포니카와 카날플러스, 독일 보다폰과 케이블도이칠랜드의 합병 소식은 듣고 가볍고 넘길 일이 아니다.

 반면 KT·LG유플러스는 통신1위가 케이블TV 1위와 합병하면 시장을 독식하게 돼 ICT 생태계가 오히려 망가진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CJ헬로비전 가입자 416만 명에게 통신요금 인하를 내세워 유·무선 결합상품을 팔면 통신 1위의 과점이 심화된다는 것이다.

해외의 방송·통신 M&A에도 시장지배 1위끼리의 결합은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특히 방송은 공정성과 객관성이 중요한데 SK텔레콤이 일부지역에서 독점적인 지역채널 운영권을 갖게 되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양측의 대결은 급기야 “방송·통신이 융합된다는 건 자기기인(自欺欺人·자기도 속고 남도 속이는 일)”, “사업자의 자질과 도덕성이 의심된다”는 막말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아쉬운 건 이해당사자들이 서로 치고받고, 미래부는 여론에 묻겠다며 슬그머니 화살을 피하는 사이에 대한민국 산업 경쟁력 제고라는 핵심 주제가 논의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통신은 산업의 동맥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건설업과 유통물류의 혁명을 가져온 것처럼 통신 네트워크는 플랫폼과 콘텐트 사업의 근간이다.

카카오톡 같은 서비스가 순식간에 시장을 장악하고, O2O(온라인-오프라인) 서비스가 활기를 띠며, 삼성·LG의 스마트폰이 세계 시장에서 인정을 받는 건 세계 최고 수준의 통신 인프라가 갖춰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핀란드 ‘노키아 제국’의 몰락은 단순히 스마트폰 시장 변화를 못쫓아간데 원인이 있는 게 아니다. 3G 통신망이 아이폰의 등장을 불렀지만 당시 노키아의 안방인 유럽은 2G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마트폰이 태어날 토양이 없었던 것이다.

 미래부가 여론 수렴에 나서자 이통3사 직원들은 여론 싸움에 나서고 있다. 세 회사의 직원이 사이버 전사가 되가고 있다는 얘기다. 밤을 새워 연구하고 새로운 서비스를 고민해야할 이들이 상대방 험담에 매달리는 현실에선 미래를 꿈꿀 수 없다.

미래부는 여론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어떤 정책이 산업의 파이를 키울 것인지를 봐야 한다. 그래서 한국의 통신이, 콘텐트가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가게 해야 한다. 열흘 뒤 국내 시장에서 서비스 유료화를 시작하는 ‘콘텐트 공룡’ 넷플릭스처럼.

박태희 경제부문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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