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오일쇼크’ 부메랑에 조선·건설부터 휘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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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호 18면

최근 종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우리나라가 ‘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 호황을 누리던 80년대 중후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85~86년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미국 석유회사들의 증산을 견제하기 위해 대대적인 물량 공세를 벌였다. 당시 국제 유가는 배럴당 28달러에서 14달러로 반토막이 났다. 미국이 경기 부양을 위해 달러화 가치를 강제로 하락시켰고(플라자 합의), 이 과정에서 금리도 낮아졌다. 수출에 의존해 온 한국 경제엔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기업은 유가 하락으로 원가 절감에 성공했고, 낮은 금리로 투자도 늘릴 수 있었다. 달러 환율이 떨어지며 원화가치가 높아졌지만 일본·대만 등의 통화가치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상승하면서 가격 경쟁력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유가 하락은 가계의 실질 구매력을 향상시키고 이자 부담을 덜어줘 소비 증가로 이어졌다. 86~88년 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2%를 넘나들었다.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서면서 외채 상환 부담에 시달리던 한국의 재정에도 주름살이 펴졌다.


하지만 요즘의 저유가는 80년대와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국책 연구 기관 5곳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국제 유가가 배럴당 63달러를 유지할 때 배럴당 90달러일 때보다 원유 수입비용을 300억 달러 줄일 수 있다. 이를 통해 약 30조원의 실질 소득 증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국제 유가가 30달러 대까지 떨어지자 저유가의 긍정적 효과는 대부분 상쇄되고 있다.


강인수 현대경제연구원장은 “저유가로 세계적인 유효 수요가 부족해지면서 수출 단가가 하락해도 수출 물량이 늘지 않는 난처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사우디아라비아·러시아·브라질 등 원유 수출에 의존하던 신흥국들은 재정난을 이유로 각종 플랜트 공사 발주를 대폭 줄이고 있다. 이 때문에 조선·건설 등과 이 분야에 제품을 공급하는 철강업까지 매출 부진을 겪고 있다. 유가 하락이 장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이어지면서 중동 산유국이 전 세계 증시에 투자한 자금을 거둬들이기 시작할 경우 국제 금융 시장도 휘청일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저금리도 경기 회복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대외적인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기업들은 투자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소비 심리도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다. 오히려 가계 부채 급증이라는 부담을 안겼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6월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인하한 직후, 3분기 가계부채가 34조5000억원 급증했다. 현재 가계부채는 1200조원에 육박한다. 원화 가치가 낮아졌지만 수출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중국 위안화, 일본 엔화 등 주요 수출 경쟁국의 통화가치가 더 많이 떨어져 가격경쟁력에 도움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경수 메리츠종금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최근의 경기 부진에는 유가 급락으로 인한 중동계 오일 머니 회수, 미국 달러화 강세(원화가치 하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주요 요인이 개선되지 않는 한 불안한 시장 환경이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경미 기자 gae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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