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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황금 보너스’, 2조 달러 금융부실 우려 키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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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호 18면

‘검은 황금의 보너스’는 효과 없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이 세운 거시경제 분석기관인 옥스퍼드이코노믹스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유가가 20달러씩 떨어질 때마다 세계 경제는 2~3년 안에 0.4% 더 성장한다”고 했다. 유가 하락으로 검은 황금(원유)이 가져다 준 이득 덕분이다. 옥스퍼드이코노믹스는 “국제유가가 40달러씩 떨어질 때마다 보너스가 글로벌 차원에서 1조3000억 달러(1560조원)가 지급되는 셈”이라고 계산했다.


검은 황금의 보너스는 얼마나 될까. 국내 휘발유값과 밀접한 두바이산 원유값이 2012년 배럴당 124달러 선이었다. 요즘은 22달러 안팎이다. 최근 2년 정도 새에 글로벌 소비자가 받은 보너스는 어림잡아 3조3000억 달러(3960조원)에 이른다. 영국의 2014년 국내총생산(GDP) 2조8000억 달러보다는 많고 독일(3조8700억 달러)보다는 조금 적다. 이 정도면 세계 경제는 지금쯤 연간 성장률이 4%는 훌쩍 넘어야 한다. 2년 새 유가 하락 이익 4000조원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세계 경제가 3.4% 성장하는 데 그칠 전망”이라고 이달 18일 발표했다. 애초 예상치는 3.6%였다. 경제 상식의 붕괴다.또 다른 상식도 깨지고 있다. 올들어 글로벌 주가가 가파르게 추락하고 있다. 적잖은 시장 참여자들이 패닉 상태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나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글로벌 주식시장이 침체단계(Bear Market) 상태에 진입했다”고 전했다. 주가가 직전 최고치와 견줘 20% 이상 떨어지면 시장 전문가들은 침체국면으로 분류한다. 미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최근 보고서에서 “(최근 시장 상황은) 역사적 경험에 대한 전면 부정”이라고 평했다. 1970년대 이후 ‘국제유가 상승=석유파동=주가 추락’이었다. 글로벌 경제사의 불행한 기억이다.


반면 국제유가 하락은 행복한 추억의 시작이었다. 글로벌 경기가 활성화하면서 주가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골드먼삭스는 “86년 말에서 86년 초 사이에 국제유가 27달러 정도에서 10달러로 추락했다”며 “그 덕에 다우지수는 2년 동안에 1200선에서 2500까지 수직 상승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국내 경제 전문가들이 부르는 80년대 후반의 ‘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 호황의 신호탄이었다. 골드먼삭스는 “저유가=주가 상승이란 행복한 추억은 1990년대에도 어김없이 되풀이됐다”고 설명했다.

20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한 여성이 아이와 함께 환전소를 지나고 있다. 유가 하락의 여파로 이날 러시아 루블화는 달러당 81루블까지 떨어지며 2014년 12월 이후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AP=뉴시스]

그런데 올들어 글로벌 시장은 국제유가 추락이 낳은 악순환에 시달리고 있다. ‘국제유가 추락→자산 가격 하락’이란 악순환이다. 미국 뉴욕의 경제분석회사인 울프 리서치는 이를 ‘수수께끼(Conundrum)’라고 표현했다. 전문가들은 단순하게 수수께끼를 풀려고 했다. 톰슨로이터는 “국제유가가 떨어지는 바람에 엑슨모빌 등 에너지 기업의 주가가 약세를 보여 시장이 불안한 것으로 전문가들이 보고있다”고 이달 초에 보도했다.


또 산유국발 불안으로 설명하는 투자은행도 있었다. 영국 바클레이스 등은 “국제유가 하락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재정과 금융시장이 불안해지고 있다”며 “산유국 불안이 글로벌 시장으로 전염되고 있는 양상”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요즘 시장 상황은 단순하지 않다. 사태가 전방위적이어서 단순한 설명만으론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자산가격 하락의 폭과 속도가 에너지 관련 종목 하락만으론 설명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주식·채권 값 동반 하락으로 혜택 사라져실제 요즘 주식시장만 불안한 게 아니다. 채권 뿐 아니라 외환 시장 등 글로벌 시장 전체가 요동하고 있다. 지역적으로 북유럽의 스칸디나반도에서 남미의 아르헨티나까지 세계 곳곳이 자산가격 하락에 몸살을 않고 있다. 세계 최대 사모펀드인 블랙스톤의 스티브 스워츠먼 회장은 20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시장 참여자들이 아주 빠르게 포트폴리오(자산 구성)을 재조정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포트폴리오의 집단 재조정은 미국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때인 2007년 초에 일어난 적이 있다. 당시 투자자들은 서브프라임과 관련 파생상품 자산이 부실화하자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산 덤핑에 나섰다. 포트폴리오 재조정은 늘상있는 일이다. 다만 집단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실제 WSJ은 월가 펀드매니저들의 말을 빌려 “투자자들이 원유가 들어 있는 펀드를 무조건 기피한다”며 “이런 기피 현상은 다른 위험자산으로 번지고 있다”고 전했다. 펀드 매니저들은 결국 투자자의 환매 요구에 응하기 위해 주식을 내다팔아 현금을 마련하느라 바쁘다.


한때 각광받던 원유가 이제는 천덕꾸러기다. 발단은 중국 성장 둔화다. 스티브 로치 예일대 교수는 최근 칼럼에서 “2000년 이후 10년 동안 늘어난 원유 수요 가운데 40% 정도가 중국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제 중국발 수요 증가는 정체 단계다.


반면 사우디가 2014년 시작한 석유전쟁(시장 점유율 쟁탈전) 때문에 공급은 과잉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주 보고서에서 “이란의 원유수출 시장 복귀 등으로 올해에도 하루 150만 배럴이 남아돌 전망”이라며 “세계가 남아도는 원유에 빠져죽을 처지”라고 밝혔다. 원유의 공급 과잉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금융시장과 거의 무관한 일이었다. 유가 하락으로 실적이 나빠진 에너지 기업의 주가가 빠졌지만 찻잔 속 태풍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장 전체를 흔들만한 파괴력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수퍼 사이클(원자재 대세상승기) 시대인 2000년대 금융 연금술이 작동했다.


연금술은 바로 펀드혁명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주가지수펀드(ETF)의 등장과 빠른 대중화다. ETF는 원유나 금·주식·채권 등 세상의 온갖 자산의 가격 변화를 거의 100% 반영하도록 설계된 펀드다. 덕분에 적어도 수만 달러가 필요했던 원유 투자가 일반 샐러리맨도 가능해졌다. 세계은행(WB)이 2004년 보고서에서 진단한 ‘원유의 금융화’다. 개인 투자자의 자금까지 뭉칫돈이 원유시장에 몰리며 국제유가는 수퍼 사이클을 그렸다.


펀드혁명은 채권시장을 통해서도 원유생산 쪽으로 뭉칫돈이 몰리도록 했다. 바로 정크본드(비우량 채권) 펀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양적 완화(QE)로 채권금리가 아주 낮아졌다. 채권 투자자들이 수익을 추구하다 결국 정크본드 펀드에 돈을 넣었다. FT는 “세계 원유 생산 회사들이 정크본드 시장에서 빌려다 원유 개발에 쏟아부은 돈이 2조 달러 정도”라고 최근 전했다.


원유 개발 회사는 정크본드 시장의 핵심 고객이었던 셈이다. 그 바람에 정크본드 지수가 국제유가 가격 흐름과 거의 같아졌다. 아니나 다를까. 요즘 정크본드 가격이 급락하고 있다. 원유 개발 회사들이 국제유가 하락에다 미국 기준금리 인상으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서다. ‘금융 상품 부실화 →경제 위기’ 우려도블룸버그는 지난주 전문가의 말을 빌려 “국제유가 하락이 리스크 3종 세트를 유발하고 있다”고 했다. ▶산유국의 재정·외환 위기 리스크 ▶투자수익 리스크 ▶채권 디폴트(부도) 리스크다. 글로벌 시장이 삼각파도를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석유가 에너지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1900년 이후 초유의 사태다.


금융버블 전문가인 고(故) 찰스 킨들버거 전 MIT대 교수는 생전에 “금융화한 자산의 가격은 오버 슈팅이 기본적인 성격”이라고 말하곤 했다. 원유 가격이 수퍼 사이클을 그렸듯이 이번엔 죽음의 계곡(Death Valley)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터무니 없는 얘기가 아니다. 글로벌 원유공급은 시장의 원리만으로 작동하는 곳이 아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안팎의 국제 정치적인 변수가 맹위를 떨치곤한다. 블룸버그는 “요즘 사우디-이란의 경쟁 관계가 원유 공급 과잉을 부채질하는 변수”라고 전했다.


실제 이란은 “경제제재가 풀리면 6개월 안에 50만 배럴, 1년안에 100만 배럴을 추가로 수출한다”고 큰소리쳤다. 사우디는 시장 점유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산유량을 줄이지 않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 등 비OPEC 산유국이 산유량을 줄이겠지만 IEA는 하루 50만 배럴에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IEA가 말한 ‘남아도는 원유에 빠져죽는 상황’이 좀체 해소되기 어려워 보이는 이유다.


글로벌 시장을 뒤흔드는 삼각파도가 더욱 거셀 전망이다. 공급 과잉 탓에 국제유가의 추가 하락폭이 만만찮을 것 전망이어서다. 극단적인 예상치는 배럴당 4달러(90년대 최저 가격은 9달러)다. 다만 빠른 반등이면 충격은 덜하다. 정크본드 시장을 통해 원유 개발 회사들에 흘러들어간 2조 달러 부실화가 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바닥으로 떨어진 유가가 상당 기간 이어지면 ‘유가 하락→금융부실’ 도미노가 작동할 수 있다. 원유시장발 금융위기의 시나리오다.


강남규 기자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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