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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 조각 촘촘히 엮어 망각 휩싸인 ‘나의 실종’과 투쟁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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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호 26면

기억은 끊임없이 위협에 시달린다. 망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일은 다반사다. 무엇보다도 시간은 기억의 천적이다. 뇌는 그 시간의 강렬한 소용돌이 속에서 기억의 퇴화를 이기지 못하는 자신을 절감한다. 그뿐 아니다. 새로운 정보가 출몰하고 난데없는 사건이 현실을 압도하면 ‘어제’는 아주 빠르게 소수의 고고학자만 흥미를 갖는 화석이 된다.


그러다가 기억은 어느새 소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는 호출된 과거를 소비하는 대중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과거에 대한 회상은 일종의 문화적 성감대로 작동한다. 하지만 민감한 사회적 기억은 여전히 피해야 할 위험 물체다. 과거의 몸이 이미 땅에 묻혀 있어도 자칫 잘못 건드리면 그 몸에 붙은 머리의 눈이 번쩍 뜨여 우리를 매섭게 노려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체온이 식어버린 ‘죽음’은 어딘가 따로 격리시켜 놓아야 할 불편함이거나 두려움이기 일쑤다.


물론 그건 때로 폭풍과도 같은 그리움으로 우리의 영혼을 기습해 오기도 한다. 누군가의 죽음이 확인되는 순간, 바로 그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돌연 엄청난 기세로 우리에게 들이닥친다. 아닌 게 아니라 기억과 죽음은 하나의 육체다. 세월호의 아이들이 그렇고 최근에 세상을 떠난 신영복 선생이 그러하며 더는 귀환하지 못할 길을 간 우리의 벗, 형제 그리고 돌아가신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러하다.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양 여겨지고 해석되지 못한 기억은 정체불명의 그림자처럼 의미를 잃는다. 우리의 일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과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걸 느끼고 그 뜻을 캐는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평소의 공간에는 별로 없다. 나를 이루고 있는 기억들과 사건들은 서로 이어지지 않은 채 파편이 되어 뇌세포 여기저기에 외롭게 박혀 있을 뿐이다. 깨진 사금파리가 아무 데나 흩어져 버리고 난 뒤에 남은 ‘나의 실종’이다.


어찌해야 할까. 최근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아시아까지 화제가 되고 있는 노르웨이 작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경우는 ‘투쟁’을 선택한다. 그의 책 제목은 자못 그로테스크하기조차 하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영문판 제목은 ‘My Struggle’. 그런데 이 말은 영어권에서는 일상적인 의미로 쓰인다. “Life is a struggle”은 “인생이라는 게 본래 지지고 볶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거야. 살기 쉽지 않아”라는 속내를 고스란히 담은 발언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한글판, 덴마크판, 스웨덴판, 미국판, 노르웨이판 『나의 투쟁』 표지.

읽다 보면 나의 이야기로 다가와크나우스고르의 신작 소설 『나의 투쟁』은 바로 이런 보통의 삶 속에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사연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천으로 촘촘히 짜 나간다. 거기에는 자전적 사건에 대한 기록과 정치적 견해, 음악과 미술 평론에 이르는 소재들이 역동적으로 배치돼 있다. 그의 소설은 어느 장르에 속하는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방식의 글쓰기다. 이렇듯 종잡을 수 없는 스타일을 보여주는 그에게 독자들이 왜 열광하는가.


미국의 뉴요커(The New Yorker)지는 그의 작품에 대해 ‘완전한 기억의 호출(total recall)’이라는 제목의 서평에서 “지루할 때마저 흥미롭다”고 언급한다. 그냥 지나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일상을 파고드는 작가의 태도를 “고된 충실함으로 드러내는 예술적 헌신”이라는 말로 격찬한다. 발터 베냐민이 자신의 유년기를 되풀이해 기억해내고 해석하면서 자아의 복원을 시도했던 것과 닮은 작가의 내면에서 독자들은 자신을 탐색하는 렌즈를 발견한다. 우리가 소설에서 흔히 기대할 만한 서사가 이 작품에는 없는데도 읽는 이들을 빠져들게 하는 크나우스고르의 작가적 매력은 무엇인가. 그건 우리의 일상이 다름 아닌 서사가 될 수 있음을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것 쓰겠다고 생각”심장박동이 멈추고 죽음이 인간의 육신을 지배하는 순간에 대해 그가 표현한 문장은 책의 전반부를 긴장감 높게 만든다.


“일종의 신사협정처럼 정해진 법칙에 따라 삶을 내주기라고 하듯, 죽음은 생명이 완전히 꺼져버릴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 몸속으로 서서히 쳐들어온다… 움직임을 멈춘 심장은 일꾼들이 서둘러 빠져나간 공장처럼 썰렁하다. 어둠이 깔린 숲을 향해 헤드라이트를 켠 채 멈춰 서 있는 트럭들, 텅 비어 있는 황량한 막사들, 사람을 가득 싣고 산꼭대기로 오르다 멈춰버린 케이블카처럼 보인다.”


아버지와 불편한 관계는 작가의 유년기를 끊임없이 압박한다. 어느 날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과 그에 대한 기억은 비로소 아버지와 내적 화해를 이루고 작가 자신의 영혼에 고여 있던 슬픔을 만나게 한다. 아버지의 몸은 딱딱하고 차가운 죽음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지만, 그의 가슴에서 아버지는 다시 살아나 그와 대화를 나눈 것이다. 타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평범하기 짝이 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읽어가는 중에 그의 이야기는 어느새 나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독자들은 크나우스고르의 자전적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초상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지나간 일에 대한 완벽한 재현은 사실 우리들 모두 한 번쯤은 제대로 해보고 싶은 것 아닌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나라 프랑스는 시간과 기억에 대한 꼼꼼한 자술서를 쓴 크나우스고르에 대해 처음에는 시큰둥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방에서 자주 이름이 들리는 작가에 대해 그런 식의 무관심과 평가절하를 계속하는 것은 자칫 근거 없는 오만이 되기 쉽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결국 이 책을 읽어내고 만 프랑스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는 “대단한 일도 없이 그날이 그날 같은데, 그래도 그의 그날을 보고 싶은 기이한 욕구. 『나의 투쟁』은 설명이 잘 안 되는, 이상한, 자석 같은, 최면기가 있는 걸작이다. 심지어 지겨울 때도”라고 어쩔 수 없이 실토하고 만다.


삶 자체로 돌아가려 한 전투크나우스고르는 이 잡지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나는 무의미한 것에 대해, 보잘것없는 것에 대해, 소소하고 작은 것들에 대해 쓰겠다고 늘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너무 열심히 정성 들여 글을 잘 쓰려는 일에 진력이 나 있습니다. 그건 뭐랄까, 세계가 사라질 지경이 될 정도로 세계를 멀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픽션을 아주 잘 가공해서 쓰면 세계가 그 픽션 세계 아래로 사라지는 느낌이 들고 맙니다.”


작가의 진정성은 가공된 서사에 과도하게 매달리려는 순간에 도리어 파괴되고 만다는 역설을 체득하는 과정 자체가 그에게 『나의 투쟁』이 된 셈이다. 놀랍게도 프랑스 번역판의 제목은 『나의 전투(Mon Combat)』로, 투쟁을 뜻하는 ‘뤼트’(lutte)라는 단어보다 더 격렬한 쪽을 선택했다.


그는 삶을 모방한 소설보다는 그것의 원류인 삶 자체로 돌아가려 한 것이다. 그 귀환의 여정은 투쟁이면서도 사실은 전투에 가까운 실존적 모험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는 그런 모험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 크나우스고르의 도전이 갖는 가치는 여기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에 있다.


그는 이런 작업의 시발점을 어디에서 발견했을까.


“뭉크의 그림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평범한 인간이 화폭의 중심을 차지했다… 뭉크는 장엄하고 야생적인 산, 거대하고 격렬한 바다, 거칠고 난폭한 나무와 숲 아래 조그맣고 미미하게 자리하고 있던 인간의 가치를 격상시켰다… 우리 인간이 그림 자체가 되어버림에 따라 예술의 세계에선 더 이상 내부적 세상과 외부적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역동적 공간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예술은 어질러진 침대, 방 안의 복사기, 지붕 위의 모터사이클이 되어버렸다.”


이 지점에서 크나우스고르의 작품이 은닉하고 있던 비밀이 풀린다. 너무나 익숙하고 낯익어 도리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움직이고 있는 기관이자 뼈대이며 근육이고 신경세포라는 진실 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평범함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매일 매일의 시간을 업신여기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삶의 평범성이 기록하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읽어낼 수 없는 인간은 스스로에게 언제까지나 타자다. 소설의 조종(弔鐘)이 울린다고 괴로워하거나 격분할 힘조차 잃어버린 시대에 크나우스고르의 질문과 실험은 하나의 탈출구가 될지 모른다. 그건 그의 말대로 “참을 수 없는 평범함과 진부함이 심지어는 빛을 발하는 것을 경험”하는 사건에서 비롯된다. 아침에 눈을 뜨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일상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가능해지는 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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