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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좋은 개살구’ 소비자 집단소송의 허와 실…우는 소비자의 주머니 속 동전까지 빼먹나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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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따라 소비자 집단소송의 형태와 규모가 급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지역 단위로 소송이 제기됐지만 인터넷이 보급된 이후부터 온라인을 통해 대형화한다. 2000년 2월 수원역광장에서 군항공기 소음피해와 관련한 주민피해보상 서명운동을 벌이는 모습. 이렇게 현장에서 소송인을 모집해 집단소송을 벌인 끝에 2010년 12월 2심 법원으로부터 피해보상 판결을 이끌어냈다. 사진=중앙포토

2008년 2월에 발생한 해킹사고로 1천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건의 집단소송을 맡았던 A변호사는 채 한 달도 안 돼 3억원이 넘는 수임료 실적을 올렸다.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그는 해킹사고가 나자마자 포털 사이트에 집단소송 카페를 만들었다. 일주일 만에 1만 명이 넘는 소송인단이 꾸려졌다. 소송 참가자들에게는 1인당 2만원씩 수임료를 받았다. 그런데 돈벌이에 급급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선후배 법조인들의 시선도 차가웠다. A변호사는 “따가운 눈총과 비난을 받아가며 며칠씩 똑같은 서류에 도장을 찍는 단순작업을 하면서 ‘이걸 왜 했나’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소송 환경과 제도, 소비자에게 불리하고 기업과 변호인에게 유리…소송인 모집경쟁 치열해지면서 브로커 활개, 돈 거래와 개인정보 유출도

돈벌이를 우선한 나머지 변호사가 불법의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은행권과 카드사 고객정보 유출 사고가 나자 이모(55) 변호사는 집단소송 카페를 개설했다. 그런데 한 발 앞서 개설한 다른 카페에 소송인들을 뺏기자 그는 마케팅업자를 만나 카페 활성화를 부탁했다. 이 변호사의 부탁을 받은 업자는 카페에 가입한 소송 참여인들의 정보를 빼내 1만 개가 넘는 가짜 아이디를 만들어 인터넷 카페 인기 순위를 조작했다. 당시 경찰 조사 결과 3만여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으로 파악됐다.

집단소송의 인큐베이터, 온라인은 진흙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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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소송이 활발해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과거에는 공통 이슈가 있는 지역 단위의 집단소송이 주를 이뤘다. 수만 명에 이르는 대형화는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집단소송의 강점은 저렴한 비용과 함께 여론의 확산성에 있다. 다수가 참여해 여론의 주목을 받음으로써 손해 원인제공자(주로 기업이나 공공기관)를 압박할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집단소송을 공익소송으로 보기도 한다.

최근의 집단소송은 대부분 온라인에서 이뤄진다. 소송 참여자 모집부터 신청, 진행상황까지 모든 과정이 중계된다. 참여하기가 쉬운 만큼 규모도 대형화한다. 법조계에서도 집단 소송에 공을 들이는 변호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승소 시 막대한 금전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여기에 공익적 가치 실현이라는 명분이 더해져 법조인의 윤리 문제에서도 우위에 설 수 있다. 경력 관리에도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실제로 집단소송을 통해 스타 변호사로 떠오른 이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어떤 변호사들은 온라인 피해자 커뮤니티를 상대로 영업을 하기도 한다. 운영자들과 승소 보수의 일정액을 나누기로 밀약을 하는 경우도 있다. 취지의 변질이다. 집단소송의 사업성을 간파한 변호사와 브로커들이 활개를 치면서 온라인 집단소송은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됐다. 자정이 필요하지만 일회성 사안으로 뭉쳤다가 해산되는 집단소송의 특성상 지속적인 모니터 활동을 하기가 어렵다. 소비자들은 난립하는 커뮤니티들 중에서 어느 곳이 유익한지 선택할 기준이 없어 방황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만다.

집단소송 카페를 여러 개 직접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인터넷 카페 운영자 C씨는 “온라인에서 집단소송 카페는 인원 수에 따라 적게는 수십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에 거래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사건이 벌어진 직후 생긴 수십 개의 소송 커뮤니티 중 유독 한 곳이 소송 참여자를 대부분 독식한 적이 있다. 그 업체는 다른 일로 쓰였던 상위 등급의 카페를 사들여 소송 카페로 용도를 바꾸고 별도의 홍보업체를 통해 블로그와 카페 등에 사전 마케팅을 벌였다. 결국 소송 참여자 대부분을 그 업체가 가져갔다.” C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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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 관련된 카드 3사 대표들이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업체들은 집단 소송이 시작되자 재판을 지연시키며 손해배상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사진=중앙포토

2007년 중국의 해커에 의해 가입자 1천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옥션 개인정보 유출사건 당시 한 변호사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무려 10만 명의 소송인을 모집해 화제가 됐었다. 알고 보니 해당 인터넷 카페는 기존 카페 운영자에게 돈을 주고 사들인 것이었다. 이 변호사는 소송비만 걷은 뒤 함께 소송을 진행한 다른 변호사들에게 업무를 떠넘기고 소송에 불성실하게 임하다가 결국 1심 패소 후 항소를 포기했다. 애꿎은 소비자들만 이중으로 피해를 당한 셈이다. 옥션 집단 소송에서 법원은 피고(옥션)가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노력을 했는데도 고도의 해킹 기법에 의해 유출을 당했다며 피해 보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개인정보 유출 집단소송 카페의 운영자는 “과거 수행했던 집단소송의 경력과 당시 소송에 어떻게 임했는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공익을 지나치게 앞세우고 성공 보수를 쉽게 포기하는 것도 소송을 성실하게 진행할 의지가 약하거나 자신의 업체 홍보 등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며 “특히 홍보업체와 브로커를 끼고 인터넷 카페를 사들여 소송을 진행하는 곳을 절대 삼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나로텔레콤(SK텔레콤) 개인정보유출사건과 공항 소음 피해 등 여러 건의 집단소송을 맡았던 유철민 변호사는 “가급적 변호사가 카페를 직접 운영하는 곳을 찾으라”고 강조했다. 일반인이 운영하는 카페의 경우 소송비용만 받아 챙기고 잠적하거나 변호사를 선임하는 과정에서 거래가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소송지연과 소송 참여자 각개격파 전략도 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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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가 똘똘 뭉쳐 집단소송을 벌이더라도 기업의 치밀한 법정 대응에 가로막히는 경우도 허다하다. 국내 대기업과 집단소송을 벌이고 있는 젊은 변호사 B씨는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한 국내 자동차회사의 연비 과장광고 피해에 대한 소비자 집단소송을 이끌고 있다. 소송 참여자만 6천 명을 넘는다. 법조계 안팎의 관심이 높다. 경력관리를 위한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건을 맡은지 1년6개월 만에 그는 잔뜩 지쳐 있었다.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대형 소송의 선두에 선 그를 지치게 한 건 무엇일까?

B가 맡은 연비 과장 소송은 2013년 6월 국토해양부 조사 결과 문제가 된 차량의 표시 연비가 과장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7월부터 시작됐다. 해당 자동차회사는 소비자들에게 최대 40만원씩 총 500억~550억원의 보상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혔지만 불만을 잠재우지 못했다. 비교적 쉬운 재판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정부의 공식조사 결과가 있었고, 피해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미국에서도 같은 모델의 연비과장 판정과 업체의 소비자 보상이 이뤄진 뒤였다. 하지만 재판이 진행될수록 무게추가 업체 쪽으로 기울었다. 소비자는 법정 안에서도 약자였다. 특히 연비 과장의 검증 책임공방이 압권이었다. 연비가 과장됐다는 객관적인 증거인 국토부의 조사 결과를 재판부는 증거로 인용하지 않았다. 연비 과장 여부를 검증할 책임 소재를 가리는 데에만 1년이 걸렸다. 결국 원고측이 연비 과장을 입증하기 위한 감정을 진행하기로 했지만 감정을 할지 말지를 두고도 재판이 공전됐다.

우여곡절 끝에 감정신청이 받아들여지고도 또 다른 난관이 닥쳤다. 감정 기관에서 난색을 표한 것이다. 객관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선 미사용 새 차가 필요한데 새 차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집단소송 대상 차량은 2012년 5월~2014년 6월 사이에 출고됐다. 제원표상 연비가 14.4㎞/ℓ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연비 과장 논란이 불거진 뒤 해당 업체는 출고하는 차량의 연비를 13.8㎞/ℓ로 하향 표기했다. 문제가 된 미사용 차량을 구하려면 업체의 협조가 필요하지만 도움을 줄리 만무했다. 국토부도 기업에 가까웠다. 조사 관련 자료를 제공해 달라는 원고측 요청을 기업의 영업비밀에 해당한다며 거절했다. A변호사는 “모든 통로를 막아놓고 피해 사실을 증명하라는 건 조롱에 가까운 처사였다”라며 “재판이 진행될수록 한계를 느낀다”고 말했다.

재판이 지연되면서 이탈자가 속출했다. 업체는 소송 참여자들에게 개별적으로 연락해 합의를 요구했다. 6천여 명 중 2천여 명이 소송을 포기했다. A변호사는 “2천명에게 소송 포기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생각해보라”며 “소송 포기 서류를 일일이 작성해 도장을 찍고 법원에 제출하느라 아르바이트까지 동원해 법률사무소가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고 했다.

A변호사의 항변은 국내 집단소송의 현 주소를 보여준다. 집단소송이 일상화되어 가고 있지만 여전히 소비자의 이익은 후순위다. 소비자의 집단소송에 대한 기업의 대응은 갈수록 교묘해진다. 재판부가 완벽한 중립을 유지해도 소비자에게 불리한 게 기업과의 소송이다.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가 피해를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국내에서 벌어졌던 담배 소송도 앞서 소개한 자동차 연비 과장 소송과 유사한 경우다. 미국의 담배 소송은 1954년부터 시작됐다. 번번이 담배회사가 승소해오다가 1995년에 전환점을 맞았다. 담배회사 직원이 내부 기밀문건을 공개해 담배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은폐해온 담배회사들의 부도덕성이 드러난 것이다. 담배회사들은 수천억 원의 배상 책임을 떠안게 됐다.

골리앗(대기업) 마주한 다윗들의 힘겨운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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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바겐·아우디의 디젤차량 배출가스 조작사건에 대해 소비자들이 국내 법원에 이어 미국 법원에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징벌적 손해배상과 증거 조사제도를 통해 소비자의 권리 보호에 유리한 미국의 재판 환경 때문이다. 사진=뉴시스

국내에선 1999년 장기흡연 폐암환자 6명이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에서처럼 내부 문건을 통해 담배제품의 결함이나 고의적인 정보은폐 등 위법행위를 찾아내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문서 공개 신청에 대해 KT&G는 핵심 문건들을 영업비밀이라며 제출을 거부했다. 법원도 KT&G의 입장을 들어줬다. 위법성을 찾으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명백한 잘못이 확인된 경우라도 재판에 임하는 기업의 태도는 딴판인 경우도 있다. 2014년 1월의 카드 3사(롯데·농협·국민) 회원정보 유출사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당시 카드 3사 대표이사들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사태 수습과 책임을 지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이후 제기된 집단소송에서 이들은 오히려 정보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항변했다. 손해를 본 사실을 입증할 책임은 원고에게 있다고도 했다. 카드사들은 특히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원고들의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토록 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는데 변호사들은 한 목소리로 “소송을 장기화하려는 꼼수”라고 지적한다. 진행 중인 소송을 가급적 늦춤으로써 손해배상 소멸시효(3년)를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즉 2017년 1월까지만 지연 시키면 그 이후에는 소송을 걸어도 손해배상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소송 원고가 수천, 수만 명에 달하는 개인정보 유출 사건의 경우 사소한 것이라도 서류를 보완하려면 막대한 시간과 품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업들이 이를 지연 전략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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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바른의 하종선 변호사가 미국 집단소송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카드사와 집단소송을 벌이고 있는 이흥엽 변호사는 “1차 소송 결과를 본 뒤에 소송 참여를 결정하려는 다수의 피해자에게 배상을 해주지 않으려는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법무법인 고도의 이용환 변호사는 “카드사 대표들은 고개 숙여 사과는 했지만 정보유출로 인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피해 방지 및 보상조치를 내놓지 않았고, 결국 집단적인 소송만이 고객들의 권리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판사가 과중한 업무 부담을 덜기 위해 복잡한 사건을 정리하는 이른바 ‘사건떼기’도 집단소송에서 종종 벌어진다. 손해배상 사건의 경우 특히 판사들이 이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 재판 기간이 오래 걸리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려면 판결문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유철민 변호사에 따르면 원고 승소 판결문의 경우 우선 피고의 불법행위를 인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손해의 발생 인정 ▷손해와 불법행위와의 인과관계 인정 ▷피고의 항변 배척 ▷손해 액수 산정 등의 내용이 전개된다. 특히 손해 액수 산정은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하지만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문은 상대적으로 쉽고 간단하다. 통계를 돌려서 사건떼기를 독려하는 법원의 시스템도 이런 폐단을 심화하는 역할을 한다.

국내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글로벌 기업을 상대로 한 집단소송은 국내보다 미국 법원에 제기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미국의 법체계와 판례가 소비자의 권익 보호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어 우리나라 법원보다 전향적인 판결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폭스바겐 디젤게이트’ 소송에서 국내 소비자들이 미국 법원을 통해 기업에 공세를 퍼붓고 있다. 폭스바겐과 아우디의 디젤 엔진을 얹은 일부 차량 배출가스를 조작한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법무법인 바른은 2015년 9월 30일 부터 11월 24일까지 2390명의 폭스바겐·아우디 차량 사용자들을 원고로 서울중앙지법에 차량구매대금 반환 및 손해 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0월 23일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연방지방법원에 소장을 접수했다. 배출가스 조작에 따른 연비 저하와 브랜드 데미지로 인한 차량 가치 하락에 대한 보상 요구다. 글로벌 소송을 전문으로 하는 대형 로펌인 퀸에마뉴엘과 미국의 최대 소비자 소송 전문 로펌 하겐스 버만을 파트너로 삼았다. 소송을 담당하는 바른의 하종선 변호사는 “미국에서 생산한 파사트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생산한 폭스바겐·아우디 차량도 집단소송 대상에 포함시킬 계획”이라며 “이렇게 되면 손해배상 대상이 12만5천 대로 늘어난다”고 말했다.

이왕이면 미국 법원에서… 해외소송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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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소송에 참여하겠다며 바른 측에 서류를 제출한 사람은 6500명을 넘는다. 생소한 미국 법원으로 소송이 번지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이다. 환경부는 배출가스를 조작한 폭스바겐을 대기환경보전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반면 미국 법무부는 폭스바겐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미 법무부 주장이 재판에서 받아들여지면 폭스바겐이 물어야 할 벌금은 최대 900억 달러(약 107조원)에 달할 것으로 외신들은 전망한다. 미국연방검찰은 폭스바겐의 배출가스 조작사건을 강도 높게 수사 중이다. 이 밖에도 이탈리아와 프랑스 수사당국도 폭스바겐을 압수수색하며 형사 처벌을 예고하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 정부는 문제의 엔진(EA189)에 달린 배출 가스 조작장치를 확인한 뒤 인증취소, 판매정지, 과징금 부과 등의 조치를 내렸지만 검찰에 고발하지 않았다. 하 변호사는 “환경부 스스로 인증을 취소해놓고 인증 자체는 적법했다며 검찰에 고발하지 않는 건 자가당착이며 모순된 논리”라며 “정부의 이런 태도는 집단소송에서 소비자에게 불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법원을 선호하는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의 사전 증거 확인절차인 ‘디스커버리’ 제도 때문이다. 민사소송 당사자가 소송을 시작하기 전에 상대방이 보유한 정보자료를 검색해 볼 수 있는 제도다. 소송이 시작되기 전에 중요한 증거를 확보할 수 있고, 불리한 자료를 숨기거나 폐기할 경우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한 것으로 간주돼 패소 판결을 받을 수도 있다. 개인들이 기업이나 공공기관 등을 상대로 대등한 위치에서 소송을 벌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법무법인 광장의 박환성 변호사는 “기업 대 개인 간 소송의 경우 엄청난 규모의 증거자료를 확보하고 있는 기업이 소송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다”며 “소송 상대가 갖고 있는 증거자료를 확보할 수 있는 디스커버리가 도입되면 증거의 비대칭성이 해소돼 실체적인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집단소송은 앞으로 더욱 활성화할 것으로 보인다. 변호사끼리 사건 수임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박리다매인 집단소송으로 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피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어 관심이 높아진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국내에서 벌어지는 집단소송은 단체 소송이나 공동 소송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이다.

사전적 의미의 집단소송은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에서 피해자들의 대표가 구성원 전체의 손해배상 청구액을 일괄 제소하는 형태다. 예를 들어 개인정보 유출사건이 발생했을 때 현재에는 소송에 참여한 피해자들만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집단소송제도를 활용하면 소송 참여자들이 전체 피해자들의 대표성을 갖고 총 피해액을 청구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증권관련 집단소송제도만 허용되고 있다.

제도 바뀌지 않으면 탐욕의 온상 된다

집단소송제도가 도입되면 공익성이 강화되고 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게 시민사회의 주장이다. 특히 최근 홈플러스가 경품 행사를 미끼로 취득한 개인정보 2400만 건을 보험사에 팔아 231억 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사건에 대해 법원이 무죄라고 판결하자 집단소송제 도입에 힘이 실리고 있다. 공교롭게도 홈플러스가 개인정보를 거래한 시기는 2014년 개인정보 유출사태와 겹쳐 더 큰 비난을 받는다.

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 기업의 이중적 행태가 근절될 것이란 기대가 크다. 현대차가 연비 과장 논란이 벌어지자마자 재빠르게 미국 소비자들과 합의하려고 노력한 이유가 집단 소송 때문이란 것이다. 같은 논란이 벌어졌을 때 국내 소비자들이 소송에서 보인 태도와 비교된다. 집단소송제도는 진흙탕이 된 현재의 집단소송 시장에서 질서를 회복할 대안으로도 꼽힌다. 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 한 건의 집단소송만으로도 같은 피해를 입은 소비자들을 모두 구제할 수 있다. 소송인을 끌어 모으려는 경쟁이 불필요해져 부작용도 사라지 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임제혁 변호사는 “기업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시민과 소비자의 견제장치는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2011년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하도급법)이 개정되면서 도입됐다. 하도급업체에 기술자료를 요구하는 사업자에게 손해의 최대 3배를 배상하도록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없다는 게 법률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오영중 변호사는 지난해 4월 20일 서울지방변호사회가 개최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법리적 필요성보다 정책적인 요청, 즉 기업 양극화와 경제민주화라는 독특한 정치적 시각에서 도입됐다”며 “하도급업체가 신고나 소송을 제기하면 동종업계에서 사업이나 거래를 계속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어서 불이익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김차동 한양대 로스쿨 교수는 “불법행위라는 사실을 알면서 허점을 악용하는 악의적 불법행위자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만이 유일한 사법적 대책이 될 수 있다”며 “형사상 제재와 행정벌에 의한 제재효과는 이미 효율성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세계적 흐름이다. 이미 해외에 생산기지와 판매네트워크를 갖춘 국내 대기업들 상당수는 외국의 소비자 보호제도에 맞춰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유독 국내 소비자에게만 인색한데, 외국에 비해 소비자 권익을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가 부족한 탓이다. 하지만 재계가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제도 도입이 불투명하다. 재계가 강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기업을 규제하는 이런 제도들을 도입하면 기업활동이 위축되고, 국가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란 주장이 수년째 되풀이되고 있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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