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일 만에 파국…청년 일자리 15만개 날아갈 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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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오른쪽)이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9·15 노사정 대타협’의 파기를 선언했다. 같은 날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정부서울청사에서 연기자회견을 통해 “한국노총이 돌아와 협의하는 걸 희망하지만 안 돌아오더라도 다양한 의견 수렴을 거쳐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오종택·김상선 기자]

청년, 비정규직, 반퇴세대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달리던 노동개혁호의 시동이 꺼졌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9·15 노사정 대타협 파기의 피해자도 이들이다.

대기업, 개혁 전제 채용 10% 늘려
올해 신규 인력 규모 줄일 것 뻔해
금융·제조 대기업 노조가 파기 주도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태도도 한몫
“서로 책임 통감, 대화 끈 놓지 말아야”

지난해 9월 15일 노사정 대표 10인이 사인한 대타협 합의문과 이를 기초로 만들어진 노동개혁법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청년 고용 확대를 위해 상위 10%의 고소득자는 임금 인상을 자제한다. ▶근로 시간을 단축해 청년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약 15만 개로 추산). ▶대기업 원청의 노사는 중소협력업체에 임금 인상 비용 부담을 전가하지 않고, 임금·복지를 개선한다. ▶적정 납품단가를 보장해 공정거래 질서를 확립한다.

▶기간제 근로자에겐 3개월만 일해도 퇴직금을 주고, 쪼개기 계약을 금지한다.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이직수당을 지급한다. ▶비정규직을 생명이나 안전업무에 함부로 투입해선 안 된다. ▶실업급여를 인상한다. ▶파견시장을 넓혀 장년층에게 일자리를 준다. ▶출퇴근 사고를 산업재해로 인정한다. ▶차별하면 징벌적 손해배상을 하도록 한다.

대부분 고용시장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근로자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권순원 숙명여대(경영학) 교수는 “대타협 파기는 자기 부정”이라며 “그에 합당한 해답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노총은 파기 선언을 하며 답을 내놓지 않았다. ‘노동악법’이라며 투쟁하겠다는 다짐이 전부다. 주도한 쪽은 금융과 공공, 제조와 같은 산별연맹이다. 대기업과 공공 부문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한국노총 안에서는 세력이 가장 큰 조직에 속한다.

이들 산별연맹은 2014년 시작된 노사정 논의 때부터 반대해 왔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한마디로 일부 연맹의 기득권 지키기가 이번 사건의 본질”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다고 투쟁 동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4월 총선을 겨냥한 정치권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기득권 중의 기득권으로 인식되는 정치권과 노동계의 결합에 국민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미지수다.

한국노총 내 온건파와 강경파의 대립으로 인한 내홍도 있을 전망이다. 특히 올 연말 차기 한국노총 위원장 선거전을 앞두고 갈등 수위가 높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선거를 의식한 정략적 판단과 이기주의가 결합하면서 비정규직을 피해자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국노총의 합의 파기라는 돌발 변수가 등장하면서 기업도 어려움에 처했다. 통상임금 범위나 근로 시간 단축, 정년 연장에 따른 임금체계 개편,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 요건과 관련된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았다. 인력 운용에 혼란이 불가피하다.

이런 사안을 놓고 노사 간 소송전이 벌어지면 그에 따른 갈등 비용도 고스란히 기업의 몫이다.

김동만 위원장은 “가처분 소송, 위헌심판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등 산하 조직에 대응 지침을 시달해 적극 맞설 것”이라며 소송전을 예고했다.

지난해 대기업은 노동개혁을 전제로 신규 채용을 10% 늘렸다. 올해는 줄일 게 뻔하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서 구조조정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기존 근로자도 위험해진다.

 한국노총이 합의 파기를 선언했다고 해서 노동개혁이 완전히 파탄한 건 아니다. 국회에서 관련 법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노사정위원회법에 따라 대타협이 이뤄졌기에 법적 효력을 상실한 것도 아니다.

이 장관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정부 주도의 개혁을 천명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정부는 노사정 대타협 내용을 산업현장에 접목시킬 생각이다. 입법을 통한 하향식 개혁이 아니라 산업현장의 변화를 이끌어내 상향식 입법을 시도한다는 얘기다.

여기에 박근혜 대통령이 입법 촉구 서명운동에 참여하며 힘을 보태고 있다. 우호적 여론 조성으로 돌파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무조건 밀어붙이기엔 부담도 있다. 합의 파기 과정에 정부의 미숙한 관리 능력이 한몫했기 때문이다. 한국노총과의 합의를 무시하고 2대 지침을 공개하는가 하면 고영선 차관이 일방 추진을 발표하는 등 합의 파기의 빌미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조준모 성균관대(경제학) 교수는 “서로의 책임을 통감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대화를 통한 해결이란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글=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wolsu@joongang.co.kr
사진=오종택·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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