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전방 북한군이 흥얼거린 노래…남한 와서 보니 ‘사랑의 미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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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은 지난 8일 정오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에 대한 대응으로 전방지역에서 대북 확성기 방송을 136일 만에 재개했다. 이날 중부전선에서 한 병사가 방송을 위해 확성기 위장막을 걷어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동료 군인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길래 자세히 들어보니 남한 노래였다. 노래 제목이 ‘사랑의 미로’(가수 최진희)였다는 건 남한에 온 뒤 알았다.”

탈북자들이 전한 ‘확성기 위력’
고위간부 처형 소식 방송 나오면
“남한이 어떻게 알았나” 색출작업

북한 인민군 출신의 새터민 진성수(가명·54)씨가 기억하는 대북 확성기 방송의 위력이다. 그는 “지난 8일 재개된 대북 확성기 방송은 전방 초소에서 근무하는 북한 군인들에겐 한마디로 ‘신세계 안내방송’”이라고 말했다.

진씨는 “혁명가요 일색인 북한 노래와 달리 대북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남한 대중가요는 감성적이어서 자신도 모르게 따라 부르고 젖어들게 된다”고 했다. 또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나 태진아의 ‘사모곡’ 같은 노래를 줄줄 따라 부르는 인민군이 많았다”고 전했다.

미처 몰랐던 남북 간 주요 사건을 대북 방송을 통해 알게 된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인민군 출신의 김재형(가명·46)씨는 “1996년 ‘강릉 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북한 상어급 잠수함이 강릉 부근에서 좌초된 뒤 북한군 특수부대원 26명이 강릉 일대로 침투한 사건)도 대북 방송을 통해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렇게 큰일을 왜 북한에선 쉬쉬했는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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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까지 북한의 공수저격여단에서 작전참모로 근무한 뒤 탈북한 윤철민(가명·58)씨는 “북한이 사고를 칠 때마다 미국은 물론 러시아나 중국까지 비난 성명을 내는 걸 보고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구나’라는 걸 깨닫게 됐다”고 했다.

또 대북 방송을 타고 전해지는 북한 정보가 엉뚱하게 숙청에 활용되기도 한다.

윤씨는 “북한에선 접할 수 없는 고위 간부 처형 소식이 대북 방송에서 나오면 ‘남한 당국이 어떻게 알았겠느냐’며 대대적인 색출 작업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평소 상부와 껄끄러웠던 사람들이 숙청되거나 ‘사상 재무장’이랍시고 군 내부를 들쑤시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전했다.

대북 전단의 효과도 기대 이상이었다. 강원도 접경 북측 지역에 살았던 함경수(가명·34)씨는 “80년대 말 동네 뒷산에서 주운 대북 전단에 적힌 문구 ‘북한은 김일성-김정일 부자(父子)의 독재세습 국가’에 충격받은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전단을 보고 세습통치라는 걸 처음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북 ‘평양방송’으로 대북 방송 맞대응=우리 군이 대북 방송을 재개하자 북한도 휴전선 일대에서 확성기를 통한 대남 방송을 시작했다. 군 관계자는 “ 워낙 ‘웅웅’거려 무슨 말을 하는지 우리 군 관측소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보 당국의 분석 결과 북한 관영 라디오 방송인 평양방송인 것으로 파악됐다. 또 다른 군 관계자는 “만담이나 노래 등이 방송되고 있다”며 “대남 방송이라기보다는 전방 군인이나 주민들이 대북 방송을 못 듣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형구·정용수 기자 kim.hyoung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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