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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득의 행복어사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61호 34면

나도 그런 이야기는 몇 번 들었다. 좀체 믿기 힘들지만 내게도 팬이 있다는 말을. 직장 동료는 모처럼 동창회에 갔다가 내 글 애독자라는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샀다고 했다. 거래처 직원은 대학원 동기들 중 내 팬이 많다고 한다. 친구의 처형이, 후배의 거래처 사장이, 지인 어머니의 친구가, 선배의 아내가 가르치는 제자의 부모님이 내 글의 독자라고. 나는 들었다. 매주 일요일마다 내 글을 기다렸다가 읽는 독자들이 꽤 있다는 유언비어를.


그런 독자가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은 있다. 우선 신문의 독자들 중 상당수는 S매거진도 읽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무엇이든 뒤에서부터 읽는 습관을 가진 사람일 수 있다. 그들 중에는 드물겠지만 그래도 이런 형식과 내용의 글을 좋아할 사람도 일부 있을 것이다. 이 우주에 우리 말고도 다른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물리학자 페르미는 과학자들과 식사하다가 외계인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방정식을 이용해 계산하면 100만 개의 문명이 우주에 존재해야 한다는 가설을 도출했다. 내 글의 팬도 수백 명, 수십 명은 아니라도 몇 명은 이 우주에 존재해야 하지 않겠는가. 통계적으로, 확률적으로 말이다. 다만 페르미는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만일 수많은 외계문명이 존재한다면, 이 지구에는 외계인들이 북적거려야 할 텐데, 어째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가? 그는 훗날 ‘페르미의 역설’이라고 불리는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모두 어디 있지?” 만일 팬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어디 있지?


논어의 첫 머리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맞추어 부지런히 익히니 이 어찌 기쁨이 아닌가.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어찌 즐거움이 아닌가.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거나 속상해 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닌가.


공자의 말씀은 뻔하고 상투적인 말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신선한 발상, 새로운 주장이었을지 모른다. 공부하는 것은 기쁘지 않다. 그래서 공자는 말씀한다. 그것이 어찌 기쁨이 아닌가. 친구가 찾아오는 것 역시 즐겁지 않다. 끼니마다 대접이 수월치 않았을 것이며 무엇보다 먼 곳에서 왔으니 숙박의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부인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을까. 그래서 공자는 말씀한다. 그것이 어찌 즐거움이 아닌가.


군자에게는 혼자 공부하고 친구와 대화하는 것, 그것이 곧 ‘열락’이다. 여기 열락이 있는데 군자에게 더 무엇이 필요할까? 아무것도 필요 없다. 오직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할 뿐. 군자일수록 인정 욕구가 강하다. 군자니까,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덕과 자질을 갖추었으니까, 알아주는 게 마땅하고 자연스러우니까,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하고 속상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말씀한다. 그것이 어찌 군자가 아닌가.


나는 군자가 아니다. 나는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소망하는 소인이다. 나는 팬이 있기를, 팬을 직접 내 눈으로 보기를 열망하는 사람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지난 연말 아내와 함께 이태원에 갔다가 마침내 나는 보았다. 늦은 점심을 급하게 먹어서 그런지 이태원 거리를 다니는 내내 속이 불편했던 나는 활명수를 사기 위해 가게에 들어갔다. 계산대 위에는 60대 정도로 보이는 인상 좋은 사장님이 조금 전까지 읽은 것 같은 잡지가 펼쳐져 있었다. S매거진이었다. 낯익은 내 글씨와 캐리커처가 보였다.


사장님은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나는 긴장하거나 흥분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과 동작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나는 활명수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으며 S매거진 쪽은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눈이 자꾸만 그쪽으로 갔다. 사장님이 캐리커처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선생님 저 손 좀 잡아봐도 될까요?”


나는 생긴 것과 달리 수줍음이 많고 낯도 심하게 가리는 편이다. 그래도 팬을 만났으니 기꺼이 손을 내어 드렸다. “선생님 혹시….” 사장님은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네, 맞습니다.” “역시 맞는군요. 얼굴을 보니 바로 알겠더라고요. 체하신 게 틀림없어요.” 사장님은 엄지로 내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 눌렀다. ●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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