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게] 외국인 근로자들 초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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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남편을 위해 모자를 4개 샀습니다. 남편이 이번 여름을 너무 덥지 않게 보냈으면 합니다."

2년 전 남편과 함께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에서 들어와 불법체류하며 간병인으로 일하는 김미영(55.가명.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씨는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동 동성고 안 가톨릭청소년회관 3층에서 만난 아름다운 가게가 반갑고 고맙기만 하다.

부부가 버는 돈은 고향으로 송금하고 또 저축하기 때문에 씀씀이에 여유가 없는 데다 매일 일이 늦게 끝나 남편에게 모자 하나 사 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잔뜩 찌푸린 29일 오후 이곳에는 인도.필리핀.파키스탄.방글라데시.나이지리아.러시아.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 3백여명이 몰려 물건을 사느라 북적댔다. 길게 줄을 서 기다리다 티셔츠와 원피스를 몸에 대 보기도 하고 모자를 써 보고 신발을 신어 보는 이들의 표정은 모처럼 즐거워 보였다.

안 쓰는 물건을 모아 손질해 되팔아 얻은 수익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아름다운 가게(공동대표 박성준.손숙)가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벼룩시장을 열었다.

빠듯한 월급은 받는 대로 고국에 송금하다 보니 자신을 위해서는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 사기 어려운 이들이 마음 놓고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이곳에서는 일요일마다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무료 진료소 '라파엘 클리닉'이 열려 하루 평균 39개국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 3백50~4백여명이 무료 진료를 받는다.

그러나 진료소 측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계절별로 옷을 구입할 형편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고 봉사단체인 새한양 로터리클럽에 의류를 기증해 줄 것을 요청, 옷뿐 아니라 필요로 하는 물품을 싼 값에 살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아름다운 가게를 초청하게 됐다.

2.5t 트럭을 개조해 만든 움직이는 가게가 의류.신발.모자.그릇.소형 가전제품 등 외국인 근로자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 5천여점을 싣고 출동하자 새한양 로터리클럽은 1천원권 물품 구매 쿠폰 1천장을 아름다운 가게 물품 구입용으로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나눠 줬다.

이에 아름다운 가게는 다시 이들에게 쿠폰 금액의 두배 만큼 물품을 살 수 있도록 배려했으며 물건 가격도 평소보다 10%쯤 저렴하게 책정해 5백~3천원짜리가 대부분이었다.

필리핀에서 들어와 가정부로 일하는 수전 바레도(27.여)는 "예쁜 티셔츠와 인형.슬리퍼 등을 싸게 사서 너무 기쁘다"며 "이런 기회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최고 인기 품목은 월드컵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3천원)였으며 옷.실내화.모자.인형.그릇 등도 5백원 정도여서 많이 팔렸다.

인도에서 온 슈란전(35.서울 광진구 군자동)은 "면목동에 있는 조그만 봉제공장에 다니는데 버는 돈은 거의 모두 고국에 송금하느라 생활용품을 구입할 여유가 없다"며 "무료 진료를 받으러 왔다가 물건까지 덤으로 얻은 셈이어서 한국인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새한양 로터리클럽 회원으로 판매 자원활동을 한 윤상구(54)씨는 "의지할 데 없는 외국인 근로자도 도우면서 재활용운동을 펴게 돼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 재활용과 외국인 근로자 돕기에 앞장 서겠다"고 말했다.

박현영.민동기 기자 <hypark@joongang.co.kr>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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