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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스토리] 무역이득공유제, 자율·협력원칙 뿌리내려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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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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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 교수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비즈스토리 논단

무역 자유화로 이득을 보는 산업(또는 기업)에서 자금을 갹출해 무역 자유화로 손해를 보는 농업·농촌(또는 농가)에 나눠주도록 해야 한다는 무역이득공유제에 대한 논의는 오래 전부터 국회에서 진행되어 왔다. 정부는 국회의 요구에 따라 올해 초부터 공개적으로 무역이득공유제에 대한 검토를 시작했다. 한국농업경제학회는 농림축산식품부의 부탁으로 무역이득공유제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농업경제학회에서는 무역이득공유제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했다. 회의에는 제주도부터 강원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대학 교수와 농민단체 대표 등이 참여했다. 논의는 치열하게 전개됐다. 무역이득 공유는 시장경제에서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의견에서부터 정부의 시장개방 정책 때문에 손해를 보는 농업인을 위해 무역이득 공유를 법제화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폭넓은 견해가 거론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회의 참여자들이 부인할 수 없었던 점은 ‘강제적인 무역이득 공유제를 추진하면 도시와 농촌 간, 비농업과 농업 간에 갈등을 초래할 것이다’라는 것과 ‘지금 우리 농촌에 물질적인 도움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우리 국민의 관심과 배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항을 고려할 때 학회에서는 ‘자율’과 ‘협력’을 무역이득공유제의 원칙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고, 원칙에 따라 무역이득공유제의 대안으로서 자율적인 기부에 기초한 상생협력 재단 설립을 제안했다.

왜 농업과 농촌은 비농업과 도시의 자율적 협력을 필요로 하는가. 1990년대 초에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기 시작한 이래 농업에는 막대한 자금이 투·융자 됐고 농업은 변화했다. 평균적인 지표로 보면 농가소득의 정체, 농업인의 고령화가 여전하다. 하지만 농가별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작물과 농법을 도입해 높은 소득을 올리는 능력 있는 농가들이 속속 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의 계산으로는 이미 약 20%의 농가가 전체 농지의 약 60%를 경작하고, 전체 농산물의 약 80%를 생산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정부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잘 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보통 농가들이다. 1차적인 농산물 생산은 이미 소수의 고소득 전문 농가들이 담당하고 있으므로 이들은 다른 농가나 기업에 고용되거나, 농산물 생산 이외의 2·3차적인 부업으로 식당·숙박업, 농산물 판매·가공 등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이들 보통 농가가 판매액을 올리고 고용되기 위해서는 도시민이 농촌을 자주 찾아줘야 하고, 비농업 부문에서 농촌에 투자를 해야 한다. 이것은 정부의 힘만으로는 될 수 없다. 정부가 아무리 농업인의 2·3차 산업 종사를 장려하고 농촌에 기업이 들어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더라도 도시민이 농촌을 찾아주지 않고 비농업과 농업 간에 갈등이 있다면 농촌은 소수의 전문 농업인이 1차 농산물만을 생산하는 메마른 공간이 되고 말 것이다.

전문 농업인 육성을 위한 물질적인 투·융자가 정부 정책의 중심이 되던 ‘농업정책’의 시대는 끝나가고 다양한 가구가 농촌에 한 데 어울려 사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농촌정책의 시대가 오고 있다. 농촌정책의 시대에 우리 농업·농촌이 필요로 하는 것은 1000억원의 강제적 보상보다 1원의 진심어린 배려이다. 농업경제학회에서는 ‘자율’과 ‘협력’이라는 원칙에 입각해 상생협력재단을 제안하였건만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 원칙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항간에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준조세’ 설, ‘강제기부’ 설이 떠도는 것은 그동안 정부의 정책이 신뢰를 얻지 못한 탓도 있다. 이번에 농업을 위한 상생협력 재단이 제 구실을 해 우리 사회에 원칙이 뿌리박고 정부가 신뢰를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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