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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엔 ‘반통일’ 원심력 작용 경제 강조해 통합 구심력 키워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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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호 12면

윤영관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박사. 1990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 노무현 정부 때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냈고 미래전략연구원 원장과 한반도평화연구원 원장을 역임.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한 윤영관(65)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지난 10일 정년 퇴임했다. 그는 장관으로 일한 1년을 빼면 현실 참여형 국제정치학자로서 25년간 강단을 지켰다. ‘어느 분단국 국제정치 학도의 고뇌와 꿈’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진행한 정년 퇴임 특강이 열린 서울대 문화관 중강당은 수강 학생과 그가 배출한 제자들, 학계 인사 등 300여 명으로 가득 찼다. 윤 교수는 장관 시절에 있었던 자주파와 동맹파 논란에 대해 “이데올로기 과잉 현상이 아쉬웠다”며 “정치지도자의 사고는 실용적이어야 하고 문제 해결을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학자로서 공직에 참여한 경험에 대해서는 “두 세계를 별개로 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공부하고 실천하는 지식인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계속 내겠다”고 말했다.?

윤영관 교수가 제자들이 건넨 꽃다발을 받아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퇴임 특강에서 냉전시대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미국의 냉소적인 반응에도 철저히 국익의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동방정책을 소신껏 펼쳤다고 긍정 평가했는데.“한반도 주변 4국은 기본적으로 현상유지 세력이다. 4국은 통일 이후 한국의 외교적 행로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아마도 미국이 가장 협조적일 것이다. 동맹국인 한국 주도로 통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독은 냉전이 절정일 때 동방정책을 추진했고 보수 정당인 기민당 지도자인 헬무트 콜 총리는 1982년 집권하자 사민당의 동방정책을 과감히 계승했다. 한·미 동맹을 튼튼하게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주인의식을 갖고 한·미 동맹을 어떻게 우리 입장에서 활용할 것인가가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다. 정치지도자들이나 국민이 서독 지도자들과 같은 철저한 주인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가 핵심이다. 그 주인의식에 근거한 국가 목표를 위해 당파적 이익을 초월해 단합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한반도 위치 파악하는 지도자 안목 중요-신간 『외교의 시대』에서 전하고 싶었던 핵심 메시지는.“역사적으로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과 횡포에 시달려오다 보니 지금도 우리 국민의 의식 저변에는 우리는 힘이 약하기에 별로 할 게 없다는 체념론이 존재한다. 그러나 외교에서도 ‘뜻이 있는 곳에만’ 길이 있다. 상승한 우리 국력과 국제 위상을 고려할 때 이제 적극적 주인의식을 갖고 국제정치의 흐름을 읽어내고 정치적 구호가 아닌 외교 전략으로 대응하자는 것이다. 주변 대국들은 내심 한반도 현상유지를 원하기에 통일과는 반대방향으로 원심력이 작용하고 있다. 이를 약화시킬 주도적 외교 전략을 실천하고, 한반도 내부적으로는 경제를 강조하는 지경(地經)학적 접근으로 남북통합을 향한 구심력을 강화해 통일을 달성하자는 것이다.”


-통일전략으로서 원심력과 구심력 개념이 흥미롭다.“한반도에는 통일과 반대방향으로 가려는 원심력이 작동하고 있는데 대외적으로는 이 원심력을 약하게 하고 대내적으로는 한반도 내부의 구심력을 강하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 국제정치의 흐름 속에서 한반도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국정 최고지도자의 안목이 중요하다. 그런 지도자의 전략 방향이 세워졌더라도 그것을 범정부 차원에서 일관되고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부처별 정책 조정 및 통합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 물론 이런 목적을 위한 명목상의 정부기구나 제도가 있지만 유명무실해져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왜 지금이 ‘외교의 시대’라고 보나.“국제정치에서 대국 간의 권력관계가 큰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를 목도한 중국이 그동안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실력을 키움) 전략을 버리고 공세적 외교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이 재균형(rebalancing) 전략으로 대응하고 일본이 군사국가화 및 미·일 동맹 강화로 반응하면서 그 파장이 한반도에 밀려들어오고 있다. 특히 한반도에서 미·중의 물밑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북한의 불안정성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국이 어떤 외교 전략으로 나아가야 할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외교보다는 ‘내교(內交)’와 여의도 정치에 여전히 함몰돼 있는데.“바로 그 점이 핵심 문제다. 무역에 사활이 걸려 있으며 온통 대국으로만 둘러싸여 있고 불안정한 북한을 머리에 이고 있는 한국이라면 그 어느 나라보다도 긴장하면서 주변 국제정세를 면밀하게 읽어내고 초당파적·범국민적 차원의 전략을 짜내 실천해나가야 한다. 그런데도 25년 전 끝나버린 냉전적 이념의 과잉 속에서 여야, 좌우, 진보와 보수 간에 소모적 정쟁이 지속되고 있다. 국제정치라는 바깥 세상의 흐름을 주목하고 문제 해결 위주의 실천적 접근법으로 국가적 과제들을 풀어나가야 할 때다.”


글로벌 외교 역량과 체급 키워야 -10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핵 문제를 최우선 순위로 풀겠다고 합의했으나 이후 구체적 노력도 실질적 진전도 없는데.“미국은 이미 대선 국면으로 진입했다. 그렇게 되면 현직 대통령이 중요한 외교적 주도권을 취하기가 힘들어진다. 사실상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적 업적 추구는 이란 핵 협상 타결로 마무리 지어졌다. 오바마 행정부는 2009년 임기 시작 이후 수차례 북한의 비협조로 배신감과 좌절을 맛봤다. 지금은 북한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워싱턴 내부의 전반적인 기류다. 그런 의미에서 북핵 문제를 최우선으로 풀겠다는 것은 외교적 레토릭으로 볼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앞으로 국제정치 판도가 미·중이 선도하는 다극체제로 간다면 한반도의 미래와 남북통일에 주는 함의는.“국제정치 판도를 선도하는 미·중 관계가 협력으로 가느냐 갈등으로 치닫느냐가 중요한 변수다. 미·중 관계가 협력으로 갈수록 한반도에 대해 한·미·중 3국 간의 의견 수렴과 합의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그러나 미·중 관계가 갈등으로 간다면 상호 불신이 커져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의견 수렴 가능성도 약해질 것이다. 이 경우 어떻게 미·중 간 갈등 현안으로부터 한반도 문제를 분리시켜 한반도 문제에서만은 미·중이 협력하게 할 것이냐가 한국 외교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중·일 횡축 외에도 러시아·동남아·인도 및 중진국과의 종축외교를 강화하고 글로벌 외교를 펼쳐 우리의 외교 역량과 체급을 키울 필요가 있다.”


-남북통일과 한반도의 미래를 낙관하나.“조심스럽게 낙관한다. 우리가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같은 의식을 버리고 최소한 돌고래가 됐다는 자신감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대외 전략을 세우고 실천해나갈 수 있을 것이냐에 달려 있다. 특히 한반도 내부 차원의 구심력을 강화해나갈 수 있을 것이냐, 이를 위해 정치지도층이 초당적·범국민적 합의 기반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냐가 핵심 변수다. 이러한 조건이 만족되는 경우 통일은 가능할 뿐 아니라 통일 한국이 동아시아의 통상물류의 거점국가, 문화교류의 중심국가, 동북아 평화를 주도하는 국가로 당당히 설 수 있을 것이다.”


장세정 기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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