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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최병렬號 출범]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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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최틀러'. 한나라당의 포스트 이회창 시대를 연 최병렬(崔秉烈)대표의 별칭이다. 신문사 편집국장 시절 그의 고집과 추진력에 질린 후배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에겐 '정통 보수의 기수'라는 칭찬이 있는가 하면 '원조 수구'란 악명도 붙어 있다. 그런 그가 거함 한나라호의 지휘봉을 쥐었다. 그의 등장으로 당이 강성 보수로 돌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崔대표는 보수로 불리는 걸 개의치 않는다. 대신 늘 "보수(補修)하는 보수(保守)"라고 강조한다. 변화를 수용하는 보수라는 얘기다. 그의 정치적 입장과 당 개혁 방향도 여기에 터를 잡고 있다.

"침체와 무기력에 빠진 당을 구하려면 제대로 된 보수를 해야 한다"는 게 崔대표의 지론이다. 진보 성향의 노무현 정권과 날카롭게 각을 세울 거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도와줄 것은 확실하게 도와주겠다"고도 말해 사안별로 '상생의 정치'를 기대할 수도 있게 됐다. 그의 강점은 분명한 태도와 오랜 국정 경험이다.

崔대표는 4선 의원이다. 5공 때인 1985년 12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정무수석과 문공.공보.노동의 3개 부처 장관을 지냈다. 정무수석 시절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내는 일을 주도했고, 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터지자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그를 위기의 해결사로 서울시장에 투입했다.

그는 경남 산청의 벽지 출신이다. 게다가 40대 초에 홀몸이 된 어머니 슬하에서 형제가 빈곤하게 자랐다. 그래서 그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맨해튼에 진출했다"고 자신의 삶을 빗대곤 한다.

그는 분석력과 조직적 사고.추진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 이런 성격이 뚜렷하게 드러난 것은 노동부 장관 때였다. '무노동 무임금''총액임금제' 등을 밀어붙였다. 특히 울산 현대차 불법 파업 땐 유화적인 노태우 대통령에게 사표까지 제출하며 공권력 투입을 관철시켰다.

행정가 최병렬과 달리 정치인 최병렬에겐 시련도 많았다. 먼저 97년 대권 경선에 나섰다 꼴찌를 기록했던 게 첫 아픔이었다.

그러나 2000년 4월 전당대회에선 최다 득표로 부총재에 당선됐다. 그러나 이회창 전 총재와 겨룬 2002년 대선 후보 경선에선 당 주류의 미움을 샀다. '이회창 필패론'을 들고 나왔던 탓이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비주류로 몰려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경남 산청(65)▶부산고, 서울대 법대▶조선일보 편집국장▶대통령 정무수석▶문공부.공보처.노동부 장관▶서울시장▶12, 14, 15, 16대 의원▶한나라당 부총재▶부인 백영자(白玲子)씨와 2남1녀

남정호 기자 <namjh@joongang.co.kr>
사진=김형수 기자 <kim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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