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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황선홍 “성적에 흔들리는 내가 두려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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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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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을 위해 과감히 지휘봉을 내려 놓았지만, 황선홍 감독의 가슴엔 여전히 친정팀 포항 엠블럼이 함께 했다. [김성룡 기자]

황새를 만나러 가는 날, 전국에 큰 눈이 내렸다. ‘황새’ 황선홍(47)은 포항 스틸러스 감독직을 내려놓고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쏟아지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했던 그를 어렵게 만났다.

빠르고 세밀한 ‘좋은 축구’ 늘 꿈꿔
초심 잃을까 미련없이 자리 내놔

서울 이기고 싶어 밤잠 설치며 고민
후배 최용수 감독 덕에 나도 성장

선진축구 큰 흐름 읽으려 유럽 갈 것
마지막 목표는 국가대표팀 감독

 2008년 2월, 부산 아이파크 감독으로 부임한 그를 인터뷰 한 적이 있다. “리더십은 군림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믿음이다. 지는 것은 겁나지 않는다. 다만 성적 때문에 마음이 급해져 초심을 잃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그는 말했다.

 황선홍은 3년간 부산을 맡은 뒤 2011년 포항의 지휘봉을 잡았다. 3개의 우승 트로피(정규리그 1회, FA컵 2회)를 친정팀에 안겨준 그는 올 시즌을 마치고 미련 없이 자리를 내놨다. 2008년 당시 인터뷰 기사를 건네주자 한참을 정독한 뒤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가 ‘초심’입니다. 포항을 그만둔 것도 ‘좋은 축구를 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황선홍을 만난 날은 지난 3일. 장소는? 그가 비공개를 요청했다.

 - 감독직을 돌연 사퇴한 배경은.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컸다. 그간 나도 모르게 감독이라는 역할에 지나치게 빠져들었다. 좋은 축구, 미래지향적인 축구를 해야 하는데 성적 부담 때문에 흔들리는 내 모습이 문득문득 무서웠다.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었다.”

 - 부산에서와 포항에서의 평가가 많이 다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산에서 훈련량이 많았던 건 사실이지만, 패배주의에 물들어 있던 선수들에게 축구를 하는 가치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그랬다. 한 단계를 넘어서야 그 다음 단계를 경험할 수 있다. 부산에서는 준우승(FA컵)만 두 번 했지만, 실패라 생각하지 않는다.”

 - 포항에선 라커룸에 ‘우리는 포항이다’는 글귀를 썼다. 어떤 의미였나.

 “자부심 또는 자긍심. 서울이나 수원 같은 수도권 빅클럽과 경쟁하는 포항의 저력은 응집력에서 나온다. 젊음을 바쳐 선수 생활을 한 팀이기 때문에 내가 느낀 포항 유니폼의 가치를 선수들이 공감하길 바랐다.”

 -‘스틸타카(탁구공이 오가듯 패스한다는 스페인어 ‘티키타카’와 ‘스틸러스’의 합성어)’를 추구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축구를 하고 싶었다. 아시아 축구의 경쟁력은 속도다. 점유율이 낮아도 좋으니 빠르고 세밀한 플레이를 보여달라고 주문했다.”

 - 포항에서 제일 기억나는 순간은.

 “K리그에서 처음 우승한 2013년 12월 1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날을 겪은 나와 우리 선수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 포항은 울산 현대와 시즌 최종전에서 맞섰다. 울산이 승점 1점을 앞서고 있어 비기기만 해도 우승이었다. 포항은 후반 추가시간에 김원일의 결승골로 1-0, 드라마같은 승리를 거뒀다.

 - 이명주·손준호·김승대 등을 길러내며 ‘화수분 축구’라는 별명도 얻었다.

 “나 혼자 거둔 성과는 아니다. 포항 스틸러스 산하 중-고-대학과 성인팀이 동일한 시스템과 전술로 훈련하고 경기했다. 솔직히 (이)동국이처럼 대형 선수를 키워보고픈 욕심이 있었는데, 산하팀 감독들이 연결을 잘 하고 유기적인 플레이에 능한 선수들 위주로 선발했다.”

 - 2013, 14년은 외국인 선수 없이 경기했다. 당시 생긴 ‘쇄국축구’ ‘황선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싫어했다던데.

 “구단이 가고자 하는 큰 틀을 감독이 거스를 수 없다. 다만 외국인 선수 없이도 좋은 성적을 낸 당시 상황이 잘못 해석될 수 있다는 부분을 늘 걱정했다. 프로축구의 파이를 줄이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좋은 축구’의 정의는.

 “세밀하고 빠른 축구다. 상대가 마음 먹고 수비해도 세밀함이나 빠른 패스에 의한 연결로 뚫어낼 수 있는 축구. 공격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세밀함까지 찾을 수 있다면 그게 좋은 축구다.”

 - 그렇다면 ‘나쁜 축구’는.

 “축구를 이용해서 개인의 욕망을 채우려는 행동들 아닐까. 국제축구연맹(FIFA)의 비리나 승부조작 같은. 세상이 변하고 있으니 점점 개선되리라 생각한다.”

 - K리그의 시스템이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비판도 있는데.

 “팬들이 먼저다. 팬이 모여야 일반 사람들도 주목하고, 돈도 따라온다. 포스트시즌 부활을 비롯해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 절친한 두 동료, 최용수(FC 서울)와 홍명보 감독은 어떤 사람인가.

 “(최)용수는 후배지만 배울 점이 많은 지도자다. 그 친구 때문에 축구 많이 늘었다. 지기 싫었으니까(웃음). 며칠동안 잠을 못 자며 고민할 정도로 이기고 싶은 팀이 서울이었다. (홍)명보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브라질 월드컵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실패’라는 낙인을 찍을 순 없다. 나 뿐만 아니라 홍 감독도 이제 시작이다.”

 - 국가대표팀 감독이 최종 목표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꿈이다. 실현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면 정말 잘해보고 싶으니까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것 뿐이다.”

 - 슈틸리케 감독을 보며 드는 생각은.

 “그분의 행보에 공감 가는 부분이 많다. 한 선수를 찾아내기 위해 많은 경기를 보며 최선을 다 한다. 그 분의 축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국내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한다.”

 두 가지 일을 한 번에 하는 성격이 아니라 늘 가족들이 뒤로 밀렸다고 황 감독은 미안해했다. 그래서 당분간 미국 뉴욕대(스포츠마케팅 전공)에서 공부하는 딸과 함께 지낼 예정이다. 그 뒤에는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축구가 돌아가는 큰 흐름을 읽어보고 싶다고 했다.

만난 사람=정영재 스포츠부장, 정리=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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