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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형의 객석에서] 베토벤은 끝 아닌 시작, 이상을 추구하게 한다

중앙일보

입력

“만나는 사람마다 묻더군요. 내무부장관(아내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은식)께서도 그러세요. 왜 미련하게 전곡을 하냐고.”

양성원 & 엔리코 파체 베토벤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전곡연주

1일 저녁 세종체임버홀. 공연 전 등장한 첼리스트 양성원의 말이다. 객석에 간간이 웃음이 번졌다. 이후의 설명은 진지했다.

“첼로 소나타 한 곡 한 곡이 환상적이죠. 초기부터 후기까지 베토벤의 전체를 살펴보려면 전곡을 연주해야 합니다. 베토벤 예술이 시대를 이끌었음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올 하반기, 양성원의 의욕적인 전작주의가 베토벤을 만났다. 지난 9월 8일과 9일 세종체임버홀에서 양성원과 바이올리니스트 올리비에 샤를리에, 피아니스트 엠마누엘 슈트로세로 구성된 '트리오 오원'은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전곡 연주를 성공리에 끝냈다. 베토벤이 구석구석 마련해놓은 아름다운 풍경들을 감상한 느낌이었다. 양성원이 추구한 ‘실내악의 묘미’와 ‘베토벤의 발견’이라는 두 마리 토끼는 1일과 2일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 연주로 이어졌다.

양성원과 연주한 피아니스트 엔리코 파체는 이탈리아 출신이다. 1989년 리스트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레오니다스 카바코스와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음반(데카)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연주 전 양성원은 “파체와 정성들여 분석하고 리허설 했다. 우리의 소리가 아닌 베토벤의 소리를 구하는 과정이었다. 진한 아름다움을 청중분들께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는 모두 다섯 곡. Op.5인 1번과 2번은 초기작에 속한다. 가장 유명한 곡은 중기작인 3번 Op.69. 균형 잡힌 걸작이다. 베토벤이 이상을 추구했던 곡은 후기작인 4번과 5번 Op.102이다. 양성원과 파체는 여기에 호른 소나타인데 첼로로도 연주되는 Op.17과 변주곡 3곡까지 모두 9곡을 연주했다.

1일 첫 곡은 베토벤의 ‘헨델 유다스 마카베우스 중 보라 용사가 돌아오라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이었다. 익숙한 선율이 씩씩하고 호방하게 변주됐다. 서정성과 발랄함이 조화를 이뤘다.

베토벤 첼로 소나타 1번 Op.5-1은 당대 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정체성을 세워나갔던 시절의 작품이었다. 화려하고 역동적이면서 도발적인 젊은 베토벤의 작풍을 보여줬다.

‘모차르트 마술피리 중 연인인가 아내인가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에서는 발랄했던 주제가 구슬프게 변주되는 부분이 마음을 끌었다.

휴식시간 뒤 연주된 호른 또는 첼로와 피아노 위한 소나타 Op.17에 대해 양성원은 “체르니가 쓴 책에서는 베토벤 첼로 소나타 3번으로 기재됐던 곡”이라고 설명했다. 베토벤의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은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첫날의 끝곡이었던 베토벤 첼로 소나타 3번 Op.69은 “구조적으로 완벽하다. 베토벤의 자신감, 낭만성이 발휘됐다”는 양성원의 말대로 첼로 소나타 중 최고의 명곡다웠다. 섬세함과 완급 조절이 돋보였다. 1악장 후 조율을 다시 한 뒤 연주한 2악장 스케르초는 격렬했다. 침착했던 엔리코 파체도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3악장 아다지오 칸타빌레와 알레그로 비바체로 넘어가는 부분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관념에서 현실로,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관문같이 인상적이었다.
앙코르로 들려준 베토벤 만돌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네 WoO43a는 본공연 못지않게 귀에 들어왔다. 그윽한 첼로의 서정을 자아냈다.

2일 첫곡은 베토벤 ‘모차르트 마술피리 중 사랑을 느끼는 남자들은 주제에 의한 7개의 변주곡’이었다. 양성원과 파체는 짤막하고 깜찍한 악상을 경쾌하게 훑었다.

첼로 소나타 2번 Op.5-2에서는 기도하듯 혹은 꿈꾸는 듯한 모습과 의지에 찬 격렬함이 엇갈렸다. 저돌적으로 연주하는 양성원의 모습에서 검객 같은 이미지가 느껴졌다. 피아노는 해맑았고 첼로는 노련했다. 연주를 마치고 두 연주자는 손을 굳게 맞잡았다

남은 곡들은 후기 작품인 4번과 5번이었다. 현악 4중주와 마찬가지로 베토벤의 후기 작품에는 고요함이 우세하다. 인생의 정수가 응축된 적요는 교향악 총주보다 더 웅변적이다.

첼로 소나타 4번 Op.102-1을 양성원은 “베토벤의 언어가 압축돼있다. 인생의 그리움과 희망이 지나가고 절망을 이겨내고 말겠다는 다짐이 표현됐다”고 말했다. 양성원은 곡의 시작 전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첼로에 활을 갖다 댔다. 음표 하나 하나에 처절함이 강조되었다. 중후했지만 우아하지만은 않은 아픔도 느껴졌다.

마지막 곡은 소나타 5번 Op.102-2였다. 1악장에서 대담한 속주를 보여준 양성원은 2악장에서는 쌓이는 고통과 회한을 표현했다. 3악장에서는 긴 고통에서 기쁨의 푸가로 나아가는 감격이 있었다.

양성원과 파체는 베토벤 ‘만돌린과 피아노를 위한 곡인 아다지오’ WoO43b를 앙코르로 연주했다.

양성원은 전곡 연주의 소감을 이렇게 얘기했다. “7년 전 연주했을 때와 달라졌다. 더 베토벤과 가까워진 느낌이다. 음표들 하나하나에 깊이가 있고 베토벤의 정체성에서 나오는 우아함이 있더라. 베토벤은 늘 의미를 담고 이상을 추구하게 한다. 연주가 끝났어도 집요하게 다시 악보를 보게 만든다. 베토벤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의 말을 들으며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장면을 떠올렸다. 끝없는 이상의 추구 속에서 베토벤은 불멸하는 것이 아닐까.

내년에 양성원은 해외에서 뒤티외, 로랑 프티지라르, 메시앙 등 20세기 프랑스 음악을 많이 연주할 예정이다. 국내에서도 코다이의 작품을 선보이는 등 많은 연주회들이 예정돼 있다.

류태형 음악칼럼니스트·객원기자 mozar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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