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빠르거나 혹은 없거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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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호 34면

1. 버릇 나는 어릴 때 눈칫밥을 먹고 자란 것도 아닌데 자꾸 주위의 눈치를 보는 버릇이 있다. 몇 번인가 고치려고 애써본 적도 있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눈치 보는 버릇을 고치려고 한 것도 결국 내가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눈치 보는 내 모습을 사람들이 안 좋아하는 눈치라서 말이다.


2. 도서관눈치라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서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날 나는 도서관에 있었다. 내 옆에는 CC, 그러니까 캠퍼스 커플이 나란히 앉아 공부는 안 하고 온갖 애정행각을 벌인다. 물론 그들도 장소가 도서관인지라 조심한다고 목소리를 낮추고 몸짓을 은밀히 했지만 사실 그러는 게 더 신경에 거슬린다. 내 맞은편에는 여친 없는 외로움과 스트레스를 오로지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간신히 견디고 있는 예비역 선배가 있었다. 나는 선배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라는 군대의 격언이라도 가슴에 되새기는지 도서관 벽에 걸린 시계를 자주 쳐다보았다. 선배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참고 또 참는다. 인내한다. 인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을 끝내 참는 일이다. 그러나 사랑의 속삭임과 웃음소리는 인내보다 강하다. 결국 그는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여가 어데 여관인줄 아나?” CC를 포함해 도서관의 모든 학생들이 선배를 쳐다보았다. 단 한 사람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도서관 한쪽 끝에서 자고 있던 다른 예비역 형이었다. 그가 부스스 일어나며 이렇게 투덜댔다. “와? 좀 자면 안 되나?”


3. 삼치 혹은 사치언젠가 삼치구이를 먹으면서 한 정치인에게 들은 말이다. 정치인은 삼치를 좋아하는데 그건 정치인에게 삼치의 미덕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우선 부끄러움을 아는 염치가 있어야 하고, 위기 때 오히려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재치가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말 한마디를 해도 여운이 오래 남는 운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런 것들도 중요하겠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눈치가 아닐까. 정치인에게 국민과 역사를 두려워하는 눈치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사치일까? 아무튼 그날 그 정치인은 너무 말이 많았다.


4. 공감세계은행 김용 총재는 다트머스 대학교 총장 시절 한 인터뷰에서 눈치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눈치란 일종의 공감능력이다. 공감이란 단지 어떤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진정한 공감은 사람들이 왜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5. 내일 봅시다배 대리는 내일 휴가다. 연차를 하루 사용하겠다고 휴가신청서를 오후에 제출했다. 그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은 마치 자석 같아서 업무가 쇳가루처럼 그 사람에게로 몰린다. 원래 업무도 과중한데다 캘린더 배포 일까지 겹쳐 며칠 전부터 얼굴이 점점 팬더곰을 닮아가고 있었다. 눈 아래 짙어진 다크써클 때문에.


퇴근할 때 직장동료와 나누는 인사로 “수고했습니다”, “들어가세요” 같은 말이 있지만 나는 “내일 봅시다”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그 말은 어쩐지 희망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약속 같다. 야근을 하고 사무실 앞에서 헤어질 때 나는 평소처럼 배 대리에게 인사했다. “내일 봅시다.” 그때 배 대리의 얼굴에 당황과 황당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나는 평소처럼 인사했을 뿐인데 배 대리는 왜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일까?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계속 생각했지만 끝내 알 수 없었다.


6. 눈겨울에 계속 내리는 눈은 참 눈치가 없다. 눈 치우는 사람들 생각도 안 하고.


7. 평판내가 생각하는 자신과 남이 보는 내 모습에는 차이가 많다. 정반대인 경우도 있다. 종종 나는 눈치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억울한 심정을 아내에게 호소했다. “여보, 사람들이 나보고 눈치가 없다고 하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당신이 생각하기에도 정말 내가 눈치가 없는 것 같아?” 아내는 펄쩍 뛴다. “아니,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역시 누구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내다.


“눈치가 없다는 걸 당신 지금까지 몰랐단 말이야? 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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