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선 2035

당신에게 보내는 ‘그린라이트’가 아닙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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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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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

며칠 전 취재 중에 생긴 일이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나한테 친절하고, 잘 웃고, 살가웠던 친구였는데….” 성추행으로 고소 당한 대학교수 A씨는 조교이자 여교직원인 B씨를 두 번 안았다고 말했다. 한 번은 일을 잘해보자는 격려였고, 또 한 번은 일을 잘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였다고. 그러면서 둘의 평소 친분을 알면 성추행은 못할 말이라며 부인했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그 친구’는 과연 그랬다. 교수의 평가대로 친절하고, 잘 웃고, 살가웠다. 잠깐 만나자는 기자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지 못해 결국 커피숍에 마주 앉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불편한 질문에도 얼굴 한 번 티 나게 찡그리지 않았다. 2년 가까운 조교 생활을 어떻게 했을지 대강 그려졌다. “마음고생이 많았을 텐데, 씩씩하네요.” “네, 원래 성격도 그런데…노력하고 있어요.”

 비슷한 시기 SNS에서 불거진 논란 하나가 떠올랐다. 영화배우 류승룡씨가 같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 수지에 대해 “여배우가 현장에서 가져야 할 덕목들 기다림, 애교, 그리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감을 주는 존재감, 꼼꼼함을 갖췄다”고 칭찬했다. 왜 아니었겠는가. 누가 봐도 그리 밝고, 맑고, 예쁜데. 나쁜 의도도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동료 배우로서 “존재만으로 아름답다”는 평가는 여전히 아쉬웠다. 교수가 조교에게 “나한테 살가웠다”는 얘기와 정도는 다를지언정 부적절한 인식이란 생각에서다. 나는 교직원 B씨의 친절함이나, 수지의 아름다움은 이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한 게 아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보다는 2년 계약직, 교수와 갈등 없이 일을 처리하기 위한 안간힘, 영화 첫 주연을 맡아 배우로서 인정받기 위한 그녀들의 노력이 아니었을까 한다.

 오랜만에 화창한 날씨, 야외에서 열리는 친구의 결혼식에 한껏 설렜다. 거울 앞에서 망설이는 시간은 하염없이 길어졌다. 앞머리를 넘겼다가 내렸다가, 눈 화장을 했다가 지웠다가. 기다리다 지친 남편이 칭찬인지 격려인지 모를 말을 던졌다. “내 눈에만 예쁘면 된 거 아냐?” 미안하지만 아니다. 그것보단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야근과 회식으로 얼룩진 날들이지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자기 관리에 철저한 30대 여성이고 싶었다. 그걸 알아주길 바랐다.

 꽃은 누구를 위해 피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마음대로 생각하지 마시라. 그녀들의 아름다움은 당신에게 보내는 ‘그린라이트’가 아니다.

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