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양김 이후의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권의 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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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영삼(YS)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열기가 식을 줄 모른다. 수많은 국민이 세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분향소를 찾아 애도를 표하고 있다. IMF 환란에 가려졌던 YS의 많은 업적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열기 속에는 YS가 생전에 보여준 ‘통 큰 정치’를 계승하지 못한 채 당리당략과 정쟁만 일삼아온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실망이 역설적으로 담겨 있다.

 YS와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집권을 마친 지 12년이 지났다. 그러나 정치권은 양김을 대체할 새로운 리더십을 제시하긴커녕 퇴행을 거듭했다. 양김은 싸우면서도 도울 땐 돕는 경쟁적 협력관계로 파국을 막고 타협을 끌어냈다. 그러나 지금의 여야는 ‘밀리면 끝’이란 강박관념 아래 죽기 살기로 싸우는 ‘원수정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고도성장을 구가했던 양김 시대와 달리 저성장·양극화·저출산·고령화의 4중고에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도 여야의 리더들은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불통과 독주, 장외투쟁 같은 구태만 되풀이한다. 경제 살리기 법안들이 상임위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어렵게 타결된 자유무역협정(FTA)이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못하는 상황이 일상화된 지 오래다. 최근엔 야당이 거듭된 내홍으로 지리멸렬해지면서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그렇다고 지역감정과 정치자금, 제왕적 공천권에 기반했던 양김식 카리스마 리더십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양김의 투쟁을 정당화해준 독재정권도, 일사불란하게 따라와주던 국민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민주화가 이뤄진 지 30년 가까이 흘렀고 국민의 의식수준도 크게 높아진 지금 필요한 리더십은 ‘작고 낮은 협치의 리더십’이다. 양김 같은 영웅형 정치인 대신 정당 밑바닥에서부터 커온 생활밀착형 정치인들이 소통과 정책 능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권은 이런 리더십으로 나아가는 대신 지역주의에 기대 계파정치에만 몰두해왔다. 그 결과 YS나 DJ처럼 멀리 볼 줄 아는 전략가가 사라지고 눈앞의 이익만 쫓는 생계형 정치인들로 국회가 메워졌다. 국회가 힘도 권위도 잃으니 여당 대표는 청와대 눈치 보기 급급하고 야당 대표는 4~5개월마다 바뀌는 신세로 전락했다.

 정치권이 살아나려면 스스로 개혁에 나서는 것 외엔 답이 없다. 여당은 권력자의 거수기에서 벗어나 민심과 소통하고, 야당은 정부를 몰아치면서 반사이익에만 골몰하는 대신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서로 정책으로 경쟁하되, 민생 현안에선 연대하는 협치를 실현해가야 한다. 공정한 경쟁으로 당 대표를 엄선하고, 충분한 시간과 권한을 줘 리더십을 훈련할 기회를 줘야 한다. 당을 다수 국민에게 개방해 인물을 키우는 것도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