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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문화읽기] 당시엔 쓸모없어 보이던 연구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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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영국의 과학저널리스트 에이드리언 베리에 따르면, 하인리히 헤르츠가 전파를 발견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 연구는 몇몇 알려지지 않은 과학자들이 수행했던 '바이올린 현의 진동에 관한 연구'였다고 한다.

마디의 위치에 따라 바이올린 현이 어떻게 서로 다른 소리를 만들어내는지를 연구했던 이들의 연구가 헤르츠가 전파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연구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편하게 휴대전화를 사용하거나 달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TV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으레 정부는 정책적으로 '유용한 과학'에 지원을 집중하게 마련이다.그러다보니 기초과학보다는 빠른 기간 안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응용과학에 더 많은 연구비가 투자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쓸모없어 보이는 과학이 나중에 화려하게 부활해서 유용한 기술이 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1과 그 자신 이외의 수로는 나누어지지 않는 수'인 소수에 대한 연구는 2천3백년간 계속 됐지만, 소수가 암호학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1970년대가 돼서부터다.

리베스트와 샤미르, 에이들먼은 아무리 속도가 빠른 컴퓨터라도 아주 큰 소수 두 개를 곱한 수에서 소수 두 개를 알아맞히는데 수천 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중요한 정보를 두 개의 소수로 표현한 후 그것의 곱을 힌트와 함께 전송해 암호로 사용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러한 방법을 이들의 성 첫 글자를 따 'RSA 암호법'이라 부르는데, 이 암호법은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소수나 인수분해가 쓸모없는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쳤던 연구였다.

또 어린 시절 색종이로 종종 만들었던 '뫼비우스의 띠'는 컨베이어 벨트 기술의 혁신을 가져다 주었다. 길쭉한 직사각형 띠를 한번 꼬아 양끝을 붙인 이 고리모양의 띠 벨트를 컨베이어 벨트에 적용하자 내구성이 두배나 늘어났던 것이다.

벽지 디자인에 혁명을 가져다준 수학자도 있다. 미국 텍사스대학(오스틴 소재) 수학과 찰스 레이딘 교수는 한정된 공간 안에 삼각형이나 사각형의 도형을 빽빽히 채울 때 어떤 패턴이 나타나는가를 연구해 온 수학자다.

도형들이 복잡하면서도 질서정연한 나름의 패턴으로 공간을 채워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레이딘 교수는 이런 패턴을 이용해 벽지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벽지 역시 복잡해 보이면서도 단순한 패턴이 반복된 형태를 띠고 있으니 더할 나위없이 좋은 응용이었다.

수학자가 벽지 디자인에 아이디어를 제안할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도시는 다리 하나에서부터 월드컵 경기장에 이르기까지 수학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거대한 축조물이다.

또 디지털 카메라에서 대형 전광판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둘러싼 첨단기술 속에는 지난 세기 물리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금은 쓸데 없어 보이는 과학에 우리가 투자를 해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재승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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