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 대응 노하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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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호 22면

일러스트 강일구

여럿이 모인 술자리의 일이다. 한 번쯤 만난 적 있는 옆자리 남성의 잔이 비었길래 병을 들자 그가 “형님, 한 손으로 따르세요”라고 청했다. 나는 두 손으로 술을 따랐다. 이번에는 내게 말을 놓으라고 성화를 하는 것이다. 편치 않아서 거듭 거절하자, 서운한 표정이 바로 보였다. 왜 그랬을까하는 의문은 한 강의에서 풀렸다. 중년 남성인 지역 점포 점장들을 상대로 한 강의였다. 그들에게 거래처 직원과 소주 한 잔을 하는데, 나이 차이가 나고 말을 놓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질문을 했다. 90% 정도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야 같이 일할 때 편하고 비로소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처럼 반말은 공적 관계에서 사적 관계로 질적 전환을 하는 상징적 신호다. 윗사람이 반말로 내게 말을 건네는 순간 끈끈한 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 조속히 그런 관계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에는 최적의 거리(optimal distance)가 존재한다. 내가 안전하고 편하다고 느끼는 거리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오래된 사이라 해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편안하다. 반대로 빨리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편안한 사람도 있다. 전자는 후자가 지나치게 침범한다고 여길 것이고, 후자는 전자가 거리를 둔다고 볼 것이다. 만일 사회의 일반적 룰이 빨리 위아래를 정하고, 말 놓는 것을 친근감의 표시라 생각한다면 어떨까. 한 쪽은 상처를 받거나 위협으로 느낄 가능성이 있다.


 언어는 감정과 권력 관계를 분명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시비가 붙더라도 존댓말을 하면 안전하나, 한 쪽이 “너 몇 살이야”라며 반말로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아수라장이 시작된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반말을 하면 그 말이 틀렸다고 해도 바로 반박하지 못한다. 동물의 왕국에서 무리의 우두머리가 아래 동물들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 한 번 으르렁거리면 다른 수컷들은 꼬리를 내린다. 반말은 권력관계를 명확히 하면서 우위를 점하고, 상대를 누르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최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비서 출신 측근의 불법 수수 건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너는 뭐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라고 말해 구설에 오른 것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이 가능하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그의 곁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그들은 상대가 말을 놓고 반말해 주기를 바란다. 권력에 취하면 반말에도 취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자리가 높아질수록 말을 조심해야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은연 중에 권력의 이빨을 드러내고 고개를 숙이기를 강요한다. 민주주의에 위배될 뿐 아니라,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1997년 괌에서 일어난 대한항공 여객기 추락사건은 위기 상황에 바로 의견을 내지 못한 조종사 사이의 권위 체계가 한 원인으로 꼽혔다. 대책으로 조종실에서 영어로 소통하게 한 다음, 큰 사건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도 영어로 얘기하자고 할 수는 없다. 일단 나이와 지위가 높아질수록 반말이 우리를 단번에 동물의 왕국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사는 수밖에 없겠다. 그리고 함부로 반말해대는 사람에게 최고의 대응은 같이 말을 놓는 것이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jhn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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