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는 영원한 미로 사랑이라는 영원한 수수께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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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호 14면

버지니아 울프

아주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의 마음이 이제야 비로소 이해될 때가 있다. 헤어질 땐 보통 진짜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본인들조차 잘 모를 때도 있다.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지를. 사랑하지만, 그저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것만을 직감한다.


실연의 고통이 폭풍처럼 휩쓸고 지난 후 오랜 시간이 흐르면 그제야 섬광처럼 어떤 깨달음이 스쳐간다. 우리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구나. 미칠 듯이 설레는 가슴, 네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함, 사랑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버려지는 나보다 어쩌면 나를 버린 그 사람의 마음이 더 아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이별의 의례는 완성된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지만 나의 최선이 상대방의 눈에는 절망적인 안간힘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마음은 서로의 존재를 비추는 영롱한 거울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가슴을 날카롭게 내리긋는 흉기이기도 하다.


아내의 일기장에 등장한 낯선 남자의 이니셜버지니아 울프의 『유산』도 그렇게 상대방이 떠나고 나서야 사랑하는 사람의 진심을 깨닫는 이야기다. 남편은 자신의 아내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완벽한 잉꼬 부부였다. 저명한 정치가 길버트의 아내 안젤라는 남편을 빈틈없이 내조했으며 누구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피커딜리 광장에서 차도로 내려서다 그만 차에 치여 죽고 만다.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던 남편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가족들은 물론 친구들, 심지어 비서에게 전해 줄 마지막 선물까지 완벽하게 챙겨놓고 간 아내의 속내가 궁금해진 것이다. 왜 젊은 사람이 이토록 필사적으로 물건을 정리해 놓은 것일까. 안젤라가 남기고 간 물건 하나하나에는 일일이 지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남편 길버트에게는 일기장이 남겨져 있었다.


평소 안젤라는 길버트에게 비밀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일기를 쓸 때만은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일기를 쓰다가 남편의 인기척이 들리면 얼른 일기장을 덮어 버리거나 손으로 가리곤 했다.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내가 죽으면 모를까.”


두 사람이 공유하지 않은 것은 일기장뿐이었다. 안젤라는 유명 정치가의 아내로서 완벽한 내조를 해 왔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소원해져만 갔다. 남편은 아이 없이 살아가는 부부가 의례 겪는 일이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내의 비서였던 시시 밀러에게 유품으로 남긴 브로치를 전해 주며, 남편은 비서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챈다. 시시가 상복을 입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의 친오빠가 얼마 전에 죽었다는 것을 떠올린다.


‘그런데 시시는 왜 나를 그토록 동정 어린 눈빛으로, 뭔가 갈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걸까? 혹시 시시가 나를 몰래 짝사랑해 온 것은 아닐까?’


길버트는 이런 생각에 깜짝 놀라 피식 웃음이 나온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흘끗 바라보며 ‘아직 나는 준수하다’라고까지 생각한다. 일기장 속 아내도 그랬다. 자신은 완벽한 남자와 결혼했다고. 아내는 신혼 초 일기장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길버트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의 아내라는 것이 너무도 자랑스럽다.”


그렇게 남편을 우러러보던 아내의 일기에서 점점 남편의 이야기가 줄어 간다. 어느 날 그녀는 어렵게 자신도 바깥일을 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길버트가 하원의원으로 출마했을 때, 아름다운 아내 안젤라는 그의 자부심이 되어 주었다. 길버트는 어딜 가든 자랑스러웠다. ‘여기 있는 여자들 중에서 내 아내가 가장 아름답군.’


아이가 생기지 않아 안젤라가 그토록 슬퍼했다는 것도 일기장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내는 일기 속에서 점점 남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감을 걱정하고, 언제부턴가 일기장에서는 BM이라는 이니셜의 낯선 남자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아내는 BM과 저녁을 먹고, 사회주의에 대해 열띤 논쟁을 하고, 그로 인해 점점 마음이 무거워진다고 고백하고 있다. 길버트는 궁금증에 빠진다. 도대체 BM이 누굴까. 어떤 녀석이기에 감히 나처럼 영향력 있는 남자의 아내를 넘보는 걸까.

사랑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여인의 표정은 과연 어떤 것일까. 미국 화가 레온 크롤의 ‘예술가의 누이’(1912·윗 그림)와 미국 화가 조지 벨로우스의 ‘플로렌스 다비’(1914). 사진 민음사

아내가 돌변한 이유를 뒤늦게 알아차리다BM으로 인해 그녀는 돌변했다. BM은 상류층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와 가까워진 이후 아내는 아이가 10명이나 딸린 미망인의 일자리를 구해주는 등의 봉사활동에 열렬히 참여하게 되었다. 무심코 입던 화려한 옷이나 비싼 모자조차 그녀는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BM이라는 남자 때문에 인생관은 물론 생활방식까지 바꾸게 된 것이다. BM이 남편인 자신을 비난했다는 대목에 이르자 길버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그가 아는 아내는 낯선 남자, 그것도 사회주의자와 저녁을 먹을 사람이 아니었다. 일기장에 이니셜로 그 남자의 이름을 비밀스럽게 적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죽은 안젤라의 일기장은 너무도 분명하게 남편 아닌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유부녀의 고통스러운 비밀을 폭로하고 있었다. 마지막 일기의 내용은 BM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며 절망하고 있었을 아내의 쓰라린 속내가 이제야 읽혔다. 길버트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시시 밀러에게 전화를 했다. “도대체 BM이 누구요?”


시시로부터 기상천외한 답변이 돌아온다. BM은 바로 그녀의 오빠였던 것. 그제야 시시의 오빠가 얼마 전에 자살했다는 소식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내는 그 남자를 따라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안젤라는 애인을 따라 인도에서 차도로 뛰어들었다. 남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차도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 스릴 넘치는 소설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믿었던 사람의 속내를, 우리는 평생 모르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리학자 융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드높은 산맥이다. 이제 다 올랐다 싶으면 어느새 그보다 훨씬 더 높은 또 다른 봉우리를 보여주는 험준한 산맥이다.”


정말 그렇다. 남편은 아내의 비밀을 몰랐고, 아내는 사랑의 비밀을 몰랐다. 비밀 따윈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다고 믿었던 아내가 평생 비밀을 간직한 채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따윈 하지 않을 것만 같던 얌전한 아내는 사랑 때문에 목숨마저 미련 없이 버렸다. 모두가 사랑을 잘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랑의 비밀은 이렇듯 우리의 모든 확신을 비웃는다.


사랑이란, 이제 사랑에 대해서라면 좀 알겠다고 확신할 때쯤 어느새 믿을 수 없이 낯선 얼굴로 돌변하는 그 무엇이다. ●


정여울 ?작가, 문학평론가. 문학과 삶, 여행과 감성에 관한 글을?쓴다.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그때 알았더라면?좋았을 것들』『헤세로 가는 길』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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