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길과장’ 사라져야 행정이 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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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호 30면

정부세종청사 관가 주변에 ‘길과장’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서울을 오가느라 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내는 공무원이라는 뜻이다. 자조와 비꼼, 해학 등이 두루 버무려진 신조어다.


요즘 세종청사 실·국·과장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바쁘다.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을 심의하고 있는 터라 연일 서울을 오간다. 행여 자신이 담당한 업무의 예산이 깎이거나 빠질까봐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연말 공무원들의 관심이 가장 쏠리는 곳이 국회다. 행정부가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는 데 필요한 예산의 심의와 통과를 국회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회는 수시로 자료 제출과 관계 공무원 출석을 요구할 수 있고 감사권까지 갖고 있어 국회에 밉보여서는 무슨 일을 하는 게 사실상 어렵다.


세종청사 공무원들이 서울을 오가는 게 얼마나 잦은 지는 출장비에서 잘 나타난다. 세종청사 중앙행정기관이 최근 3년 동안 지출한 국내 출장비는 2013년 157억7800만 원, 2014년 239억6800만 원, 올 상반기 106억8100만 원 등이다. 대부분이 여의도 국회를 오가느라 지출한 비용이다.


어찌 보면 ‘길과장’이나 ‘길국장’은 힘없고 안타깝고 서글픈 존재다. 이들은 “예산을 한 푼이라도 지키려면 잘 보여야지요”라거나 “오라면 가야지 어떡합니까”라고 하소연한다. 공무원들은 국회를 불가침의 상전이자 ‘수퍼 갑’처럼 여긴다.


이런 ‘길과장’에게 요즘 실낱같은 희망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회의 세종시 이전론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다. 세종청사 관가는 물론 학자·언론·정치권까지 국회의 세종시 이전을 거론한다. 조금 지나면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공론화해야 할 듯한 흐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원(分院)을 설치하자는 얘기가 많았지만 요즘은 아예 국회 전부를 옮기자는 주장도 빈번하게 나오고 있다. 정부부처의 세종시 이전이 불변의 현실로 자리 잡았으니 행정도시를 부정하기보다 실현 가능한 근본적 대안을 찾자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 전 정의화 국회의장은 “세종시에 최종적으로 입법부까지 내려오는 게 맞다”고 소신을 밝혔다. 세종시를 미국 워싱턴처럼 행정수도로, 서울을 뉴욕처럼 경제수도로 만들자는 것이다.


정 의장은 또 “가려면 다 가야 한다”며 분원을 설치하기보다 국회 전체를 이전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입법부 수장이 국회를 세종시로 통째로 옮기자고 한 것은 이례적이고 주목할 만한 발언이다. 국회의원들도 국회와 정부부처의 이격(離隔)에 따른 문제점과 그 대안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정부세종청사에는 총리실 등 9부2처2청이 이전했고 1만5000여 명 중앙부처 공무원이 일하고 있다. 세종시는 정부 기능의 3분의 2가 자리 잡은 실질적인 행정수도다.


현실을 인정하고 세종청사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현명하다. 여야가 법을 만들어 추진한 행정도시는 국가균형발전의 상징이다.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이고,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다. 이제 와서 행정도시 무용론이나 반대론을 제기해봐야 불필요한 갈등과 혼란, 국력 낭비만 부를 뿐이다.


세종청사 중앙부처 공무원은 대한민국의 기둥이고 미래다. 요즘 공무원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실력과 열정, 비전을 두루 갖춘 공직자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나라 발전의 지름길이다. 일주일에 2~3일을 길 위에서 보내는 ‘길과장’과 ‘길국장’이 언제 정책을 기획하고 민원인을 만나며, 업무를 추진하겠는가. 결재를 하고 직원들과 소통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세종청사 ‘길과장’은 오늘도 새벽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가 저녁 열차를 타고 세종시로 돌아온다. 지치고 피곤한 마음과 몸으로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국회분원을 설치하든, 전체를 옮기든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정부와 정치권이 미래를 위해 속히 결단을 내리는 게 옳다.


공무원들이 안정적이고 든든한 둥지에서 맘껏 일할 수 있게 해주자. ‘길과장’을 더 이상 길 위의 나그네로 방치하지 말자. ‘길과장’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자.


이춘희세종특별자치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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