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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김정일의 독백

중앙일보

입력

나는 지금 주석궁에 누워계신 아버님을 찾아가고 있다. 새벽 1시다.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염소 종축장을 현지지도하고 인민군 763부대를 시찰한 뒤 평양에 돌아왔지만 피곤하진 않다. 잠도 오지 않는다. 인민과 인민군의 충성심은 언제 봐도 든든하다. 그런데 자꾸 불안한 생각이 든다.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가 쓴 책 때문일까.

'김정일의 요리인-가까이서 본 권력자의 모습'에 대한 보고서는 이미 읽어보았다. 그 빌어먹을 놈이 왜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일을 꺼냈는가 말이다.

내가 1994년부터 미국 정찰위성에 포착되지 않게 항상 늦은 밤이나 새벽에 벤츠 열대 행렬의 선두에서 움직였다고? 아버님 사망 때 내가 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고민했고, 권총을 꺼내놓았다 마누라한테 들켜 혼났다고? 내가 셋째 정운(20)이를 애지중지한다고? 나는 내 은밀한 움직임과 권력승계, 후계구도에 대해 좀 안다고 떠드는 자들이 진짜 싫다. 그 아픔과 공포를 어느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남조선에서 황장엽(78)이가 미국을 가기 위해 여권을 신청했다는 소식은 또 뭔가. 아무래도 그 黃가가 미국에서 망명정부를 선언하고 부시와 함께 '포스트 김정일 체제'를 준비한다고 설쳐댈 것 같다.

그들도 나를 제거하려면 대안이 필요할 것이다. 부시는 이라크를 칠 때 친미파 찰라비를 전후 과도정부 수반으로 미리 꼽아놓지 않았던가.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도 조심해야 한다. 그에게선 전임자 장쩌민(江澤民) 같은 사회주의적 동지애를 느낄 수가 없다. 혁명 경험이 없는 기술자 출신인 데다 미국 눈치만 보는 겁쟁이가 국가주석이라니. 후진타오는 올 초에 내가 미사일 실험을 좀 했기로서니 그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에 유입되는 송유관을 사흘 동안 끊어 내 목줄을 조이려 했다.

남조선과 중국.미국이 짜고 나를 제거하려 한다. 김대중.장쩌민.클린턴 때는 마음 붙일 곳이라도 있었는데. 알랑거리는 측근들일수록 신경이 쓰인다. 누가 엉뚱한 생각을 품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이런 고민의 흔적조차 보여선 안된다. 그래서 나는 지금 혼자 아버님을 찾아간다. 집권 10년 만에 닥친 위기 탈출의 방도를 묻기 위해서.
전영기 정치부 차장 chuny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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