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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야 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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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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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지난달 부모님과 캐나다 나이애가라 폭포로 여행을 갔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폭포 바로 앞까지 가는 페리에 탄 한국인 단체관광객 100여 명이 쏟아지는 폭포수 파편을 온몸으로 맞으며 한목소리로 “나이아가라~”를 외치고 또 외치는 모습이다. 뭐지? 대자연의 장엄함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나. 어리둥절해하다 깨달았다. 이들이 목놓아 외치고 있는 건 폭포 이름이 아니라 “나이야, 가라!”였다는 사실을. 한 TV 프로그램에 나온 연예인이 나이애가라 폭포를 찾아와 이 주문을 외쳤고, 이후 한국 관광객들이 이를 따라 하게 됐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단체로 통성기도를 하는 듯한 그 모습에 그저 충격. 이상해, 부끄러운데 자꾸 따라 하게 되네.

 나이야 제발 좀 가라고 외쳐봐도 한 달 반 후면 한 살을 더 먹게 된다. 싸늘한 바람에 새삼 그 사실을 떠올리며 우울해진 분들께 한 가지 처방전을 알려 드리고 싶다. 출판 담당 기자라 하는 말이 아니고, 경험상 그럴 땐 책을 집어 드는 게 좋다. 단, 나보다 어린 저자들의 활기 넘치는 저작 말고 앞서 인생을 살아간 선배의 지혜와 통찰이 응축된 책으로. 개인적으로 이번 가을 고른 책은 일본 그림책 작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사노 요코(佐野洋子·1938~2010)의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마음산책)다.

 두 권 모두 작가가 유방암 판정을 받은 후 인생 말기에 쓴 책인데, 슬프지 않다. 웃음이 터진다. 암 수술을 받고 병실에 누워 ‘겨울연가’ 비디오를 보기 시작한 걸 계기로 ‘욘사마(배용준)’의 열혈팬이 된 이 할머니, DVD 구입, 한국여행 등으로 모아놓은 돈을 탕진하면서도 욘사마에게 “나타나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암 재발 선고를 받은 날 외제차 매장에 들러 “마지막 물욕”을 발휘해 초록색 재규어를 산다. 죽음이 다가오자 그동안 앓았던 우울증이 신기하게 나았다.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미련 따윈 없다. 일을 싫어하니 반드시 하고 싶은 일도 당연히 없다. 어린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죽는 게 뭐라고』의 일본어 원제는 ‘죽을 의욕 가득(死ぬ<6C17>まんまん)’이다.

 책이 싫다면 올해 개봉한 영화 ‘인턴’이나 ‘앙: 단팥인생 이야기’도 좋겠다. 갈등과 오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착한 두 영화에는 아름답게 나이든 두 어른이 나온다. 딸·아들뻘인 동료에게 자신이 가진 인생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마음을 다해 격려하는 70대. 영화를 보면 이런 깨달음이 찾아온다. 실력을 갖출 것, 후배를 질투하지 말고 응원할 것.

 그래도 마음이 헛헛하면 유엔에 의지해보자. 유엔이 지난 4월 변하고 있는 인류의 체력과 평균수명 등을 고려해 인간의 생애주기를 다섯 단계로 새롭게 구분했다고 한다. 0~17세는 미성년자, 18~65세는 청년, 66~79세가 중년, 80~99세는 노년, 100세 이후는 장수노인이다. 스물도, 마흔도, 예순도 다 청년인 시대다. “나이야 와라!” 외칠 수 있을까. 그게 안 되면 나이야 오든 말든.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