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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할아버지 돈, 손자 손에 쥐어주자는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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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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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낮 12시 일본 도쿄 긴자(銀座) 4번지 미쓰코시 백화점 인근의 한 전문 음식점. 점심 세트메뉴 가격이 1인당 최대 5500엔(약 5만2000원)이지만 매장은 손님으로 가득 차 있다. 다만 대부분의 손님은 60대 이상이다. 백발인 70대 이상 노인도 많았다. 30~40대 직장인은 찾아볼 수 없다. 10년 넘게 일본에서 생활한 관광가이드 유정미씨는 “젊은 일본 직장인이 점심식사에 쓰는 돈은 500엔 전후”라며 “가격이 10배 이상인 이곳은 연금을 받고 넉넉한 은행 자산을 가진 고령층만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세대간 자산 이동에 총력전
일본 자산의 60%가 60세 이상에
젊은 세대에 흘러가도록 세제 개편
교육 이어 결혼·출산·양육비 비과세
상속세 부담 늘려 사망 전 증여 유도
만 18세 미만 후손 명의 투자도 혜택
저출산·고령화 막고 소비 촉진 의도

 고령자에 돈이 몰려 있는 일본의 상황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일본 60세 이상 고령자의 자산규모는 일본 총 자산의 60%에 달한다. 이 때문에 일본은 고령자의 지갑을 열어 빠듯한 살림살이의 젊은이에게 돈이 흘러가도록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른바 ‘세대간 자산 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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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사회가 이렇게 된 건 저출산과 고령화, 그리고 1990년대 시작한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장기 불황 때문이다. 일본 총인구는 2010년을 전후해 줄어 2015년 현재 1억 2000여 만명이다. 일본 후생성에 따르면 가임 여성 1인당 출생자 수는 1947년~1949년 1차 베이비붐 시기 4.3명에서 2005년 이후 1.26명까지 떨어졌다. 반면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2015년 3300만명으로 전체의 26.8%다. 고령인구는 2045년에는 40%까지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고령층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 버블 경제의 혜택을 받아 부유해졌다. 비록 90년대 이어진 장기불황을 겪었지만 절약과 저축에 나서며 부를 축적했다. 특히 1차 베이비붐 시기에 태어나 버블경제 시기를 지나온 ‘단카이세대’ 가 65세 이상 노인이 됐다. 이들은 정년퇴직 후 연금까지 받는 ‘고소득 노인’이 됐다. 일본 신탁협회에 따르며 2015년 65세 이상 고령자의 1인당 저축액은 1339만엔(약 1억2600만원)이다. 30대(423만엔), 40대(707만엔)에 비해 월등히 높다.

 ‘세대간 자산 이동’의 주요 방안은 세제 개편이다. 일본 정부는 결혼과 출산·육아, 교육 등의 목적에 한해서 돈을 증여할 경우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제도를 잇따라 도입했다. 세수 감소까지 감수하면서 세대간 자산 이동을 이루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를 통해 소비와 경제도 살리고 저출산과 고령화 추세도 막겠다는 전략이다.

 2013년 9월부터 도입된 ‘교육자금증여신탁제도’가 대표적이다. 조부모나 부모가 손자나 자식에게 교육 자금을 지원할 목적으로 증여하면 최대 1500만엔(약 1억 5000만원)까지 증여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9월 말 현재 계약 건수는 14만1655만 건에, 통장에 모인 설정액은 9639억엔이나 된다. 전체 금액의 약 10%인 1205억엔은 이미 교육자금 등으로 자식과 손자에에 전해졌다.

 가네다 노리마사(兼田憲政) 일본 신탁협회 총무부 차장은 “일본 내에선 이 정도 수준의 상속 비과세 상품은 파격적 이라 고령자가 매우 선호한다”며 “고령층의 문의가 이어져 은행에선 교육자금 신탁 업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4월부터는 증여의 범위를 결혼과 출산·양육으로 넓혔다. 결혼육아지원신탁제도를 통해서다. 손자나 자식의 결혼과 출산·양육 비용으로 증여할 경우 1000만엔까지 비과세 혜택을 준다. 계약건수가 시행 6개월 만에 2695건이나 몰렸다. 현재 설정액 63억엔 중에서 2억엔 정도가 결혼과 육아로 지출됐다.

 증여 활성화를 위해서 상속세 부담을 크게 높이는 작전도 썼다. 일본 정부는 1월부터 유산을 상속할 경우 기초공제액을 5000만엔에서 3000만엔으로 낮췄다. 상속 유산이 1억엔을 초과하는 경우 최고 세율도 인상했다. 일반 상속세를 내야 할 범위도 늘고 내야 할 세금도 늘어났다.

 호리구치 카즈야(屈口司也) 일본 신탁협회 기획실장은 “상속세 과세 범위와 세율을 높인 건 전략적 선택”이라며 “죽기 전까지 돈을 가지고 있다 상속하지 말고 그 전에 자식과 손자의 결혼·출산·교육 자금으로 증여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내년부터 도입될 주니어 니사(NISA·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에 대한 기대도 크다. 주니어 니사는 만18세까지 미성년자인 손자나 자녀 명의로 주식이나 펀드 등에 투자하면 연 이익 80만엔 까지 비과세 혜택을 준다. 츠다 사토시(千田聰) 노무라증권 기획부장은 “주니어 니사는 18세까지 인출이 안 돼 장기 투자 문화를 정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일본 증권사들도 고령화한 증권 계좌 자산을 젊은 층으로 이전해 신규고객을 늘리기 위해 주니어 니사 관련 투자상품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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