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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자본주의 모델 섞은 제3의 컨센서스 필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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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호 9 면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天安門)과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 두 나라의 자본주의는 서로 다르지만 상호 대립 모델은 아니다. TPP-RCEP, ADB-AIIB는 기능적으로 분화해 공존할 수 있고, 한국은 미·중 양쪽의 제도를 동시에 선택할 수도 있다. [사진 shutter stock]

미·중 경쟁이 뜨겁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인공섬 건설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되고 동중국해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의 영유권을 놓고도 대립하고 있다. 안보뿐 아니라 경제에서도 두 강대국의 경쟁은 치열하다. 미국은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확대돼 태평양을 가로막는 사태를 막기 위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추진해 지난달 3일 체결에 성공했다. 중국은 이 협정이 자국을 포위한다며 불쾌감과 당혹감을 표출하면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 일대일로(一帶一路) 등으로 대응하고 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에 미국과 일본이 가입하지 않고, TPP에 중국이 빠진 현실은 미·중 관계가 개별 사안을 둘러싼 줄다리기를 넘어 제도 경쟁에 돌입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도는 규범을 담고 있다. 규범은 그 사회의 가치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이 통상·금융·개발과 관련된 제도를 놓고 경쟁하는 것은 경제면에서 자국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가치를 재현하는 질서를 국제적으로 확산하는 경쟁을 벌인다는 뜻이다. 이는 결국 제도와 규범 제정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려는 싸움이라 하겠다. 자본주의는 다양하게 존재하고 중국식 자본주의는 독특한 양태를 보이기 때문에 현재 미·중 경쟁은 결국 미국식 자본주의와 중국식 자본주의의 대결이란 측면을 지닌다.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란 사유화, 탈규제, 감세, 사회복지 축소, 대외개방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처방을 구성요소로 한 미국식 발전모델을 지칭한다. 1980년대 이래 전 세계에 발신·모방의 대상이 된 이 모델은 미국의 물리적 패권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체제를 동경한다는 측면이 있다. 97년 외환위기의 경우만 보더라도 국제통화기금(IMF)과 그 뒤에서 미국의 압력으로 한국은 시장 기능을 대폭 강화하는 정책 처방전을 수용했지만, 당시 김대중 정부의 구조개혁은 최상의 정책(best practice)으로서 신자유주의를 자발적으로 추진한 측면도 강했다.

중국 모델, 세계 금융위기 후 미국과 경쟁워싱턴 컨센서스는 이른 시간 내에 패권적 지위를 획득했지만 2008년 9월 금융위기로 미국의 심장 월스트리트가 무너지면서 역시 빠르게 위기에 처했다. 현실주의 권력정치의 대가인 헨리 키신저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초래한 최대 사건으로 미국의 하드파워 쇠락보다는 워싱턴 컨센서스의 추락, 즉 정치·경제면에서 미국의 주요한 소프트파워가 하락하는 데 주목했다. 그동안 미국이 구축해 온 국제제도들이 동요할 것이란 전망이었다. 실제로 IMF와 세계은행(World Bank)은 위기 앞에서 무기력했고, 대안으로 부각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워싱턴 컨센서스는 본격적 비판에 직면했다.


비판의 핵심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금융화(financialization)에 있다. 금융화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주된 이윤이 금융 행위에서 나오는 현상으로서, 금융시장의 확대에 따라 자본가 혹은 주주 가치를 극대화하는 기업경영이 강조되는 이른바 주주자본주의를 가져온다.


문제는 피케티의 연구가 여실히 보여주는 소득 불평등의 악화가 금융화 현상과 직결된다는 데 있다. 이윤이 주주에게 집중되는 반면 노동시장의 유연화, 비정규직 확대, 보수의 양극화, 복지 축소로 노동소득이 감소한다. 국가는 기업친화적 감세에 따른 세수 축소와 사회복지 비용의 증가 압력 사이에서 차입을 늘리고 싶어도 재정적자가 초래할 금융시장의 부정적 반응 때문에 오히려 비용 절감에 나선다. 결국 공공서비스 제공을 민영화해 시장의 선의를 기대하는 이른바 ‘부채국가(debtor state)’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8년 월스트리트 붕괴는 금융화를 선도한 미국 자본주의의 결함을 여지없이 노정시켰지만, 글렌 모건에 따르면 국가는 위기 극복을 위해 여러 규제장치를 마련하려 애쓰는 반면 시장은 여전히 새로운 금융시장과 신상품을 만들어 내고 있음에 비춰볼 때 금융화 과정의 결정적인 전환은 없다는 평가다. 기존의 컨센서스는 추락했지만 새로운 워싱턴 컨센서스는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대항담론으로 떠오른 것이 경이로운 성장의 사례로서 중국을 모범으로 삼는 베이징 컨센서스(Beijing Consensus)다. 중국 모델은 시장기능에 의존하는 경제성장을 지양하고 국가주도하에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개혁을 통해 혁신, 균형발전, 지속가능성, 평등성, 주체성, 사회적 안정성을 성취한다는 포괄적이고 포용적인 경제모델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래 세계경제 회복을 견인해 온 중국은 경제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자본주의 규범을 내세우면서 미국과 제도 경쟁에 돌입했다. AIIB란 개발금융기관은 종국적으론 중국 특색의 발전모델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RCEP는 미국식 자본주의 네트워크를 상징하는 TPP의 대항마로 활용될 것이다.


다양한 자본주의 창조적 재조합 필요관건은 중국 모델의 매력 여부다. 앨빈 소(蘇耀昌) 홍콩과기대 교수는 중국 자본주의를 ‘국가 신자유주의(state capitalism)’, 린난(林南) 듀크대 교수는 ‘중앙관리 자본주의(centrally-managed capitalism)’로 명명하듯 공산당·국가가 자본가 역할을 하는 체제다. 국가 주도의 효율적 자원배분의 이점을 향유하는 동시에, 국가 엘리트 간 관시(關系)와 유착·부패가 상존해 사회경제적으로 기회와 결과의 불평등을 야기하는 결함을 지닌다. 특히 린 교수는 시진핑 체제가 보다 중앙집중형이며 시 주석 개인의 카리스마적 권위에 의존하고 전통적 가치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므로 변화하는 시대 추세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기 어려울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베이징 컨센서스가 국제제도의 규범으로 자리 잡는 데 장애물은 민주주의와 수평적 거버넌스의 결여라 할 수 있다.


그럼 향후 미·중 경쟁의 세계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양국은 자국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편가르기 경쟁을 벌일 것이나, 두 체제 공히 결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어느 일방이 세계 표준으로 등극하기는 어렵다. 나아가 유의해야 할 점은 미국 자본주의와 중국 자본주의가 다른 종류의 자본주의지만 상호 대립적 모델은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의 세계는 안보의 세계와 달리 반드시 제로섬적 관계가 성립되지는 않는다. TPP와 RCEP, 아시아개발은행(ADB)과 AIIB는 기능적으로 분화해 공존할 수 있으며, 따라서 한국과 같은 국가가 미·중 양쪽의 제도를 동시에 선택할 수도 있다.


보다 중요한 관건은 일정한 결함을 가진 두 모델 중 하나를 선택하기보다 다양한 자본주의적 요소를 자국의 역사적·상황적 맥락에 맞게 새롭게 재조합할 수 있도록, 또한 미·중 간 전략적 경쟁과 안보화 논리가 자본주의 재구성을 위한 실험과 혁신의 공간을 억압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제3의 컨센서스는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창조적으로 재조합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손열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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