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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노벨 과학상 나오지 않는 진짜 이유는?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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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일간 경제지에 이런 광고가 실렸다. “4배가 넘는 570카로리나 됩니다.” 유명 제과회사의 쵸코볼 과자 광고 카피였다. 쌀밥 100그램에 비해 영양가가 4배란 얘기였다. 바로 아래에는 서독산 최신 기계(Gerhard Steinberg)를 들여다 생산하고 있어 매우 위생적이라고 적혀 있었다. 덧붙여 맛을 보기 전엔 비슷해 보이니 “유사품에 주의하라”고 해부도까지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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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70년대만 해도 우리는 ‘칼로리’가 곧 영양가를 의미하고, 과자도 외국산 기계로 만들어야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았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칼로리가 중요했던 시절이 불과 한 세대 전이었다. 그런데 다국적 청량음료 회사가 칼로리 제로(실제로는 100밀리리터 당 0.3 킬로칼로리) 브랜드를 출시한지 20년이 넘는다.

10월 30일에는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제작보고회가 열렸다. 리암 니슨을 맥아더 장군으로 이정재·이범수 배우가 호흡을 맞추고 이재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전쟁 블록버스터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을 진두지휘했던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한국의 재건에는 적어도 한 세기가 걸릴 것’이라고 했다. 전쟁 통에 한반도 공업 시설의 45%가 파괴됐으니 그리 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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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을 진두지휘했던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그는 "한국의 재건에는 적어도 한 세기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크게 빗나갔다. 53년에 13억 달러였던 우리 국내총생산(GDP)은 60년 만에 꼭 1천 배가 됐다. 60년에 79 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금년에 28700 달러를 넘었다. 세계은행은 우리나라를 고소득 국가로 분류하고 국제통화기금(IMF)도 선진 경제국가로 분류했다. 2015년 GDP는 세계 11위다.

이렇듯 단기간의 초고속 경제성장이 과학기술력 없이 가능했을까. 그럴 리 없다. 그런데 우리 과학기술계는 해마다 ‘잔인한 10월’을 맞고 있다. GDP 대비 최고 수준의 R&D 투자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아직도 노벨상을 못 받느냐”는 국민적 실망에 면목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금년에도 생리의학상과 물리학상의 수상자를 냈다. 물리학상은 작년에 잇따라 2연패를 했다. 2000년대 이후 기록으로는 미국에 이어 노벨상 수상 2위 국가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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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사상 최초로 생리의학상에서 85세의 토종 여성 수상자를 배출했다. 전통 약초 연구로 말라리아 치료제 성분을 밝힌 공로다. 이런 성과는 과학자 우대 정책과 과학기술 전략의 결실로 해석된다. 덩샤오핑은 “전 인민을 배 따스하게 지내게 할 원동력은 과학”이라며 1994년 중국과학원에서 백인계획(百人計劃)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대상자 연령은  평균 36세였다. 이후 2012년까지 ‘천인계획’으로 해외로부터 유치한 고급두뇌는 2천명이 넘는다. 2012년 시진핑 주석은 ‘만인계획’을 지시해 10년간 1만 명의 우수 과학인재를 파격적으로 지원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노벨 과학상은 인류사에서 과학의 프론티어를 개척하는 연구에 주어진다. 즉 과학의 경계를 넓힘으로써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연구가 노벨상 감이다. 이로부터 장기적으로 새로운 산업 영역이 줄줄이 나타날 수 있으며, 과학기술의 기초역량과 발전 가능성이 크다는 보증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연구개발(R&D) 예산 규모가 GDP 대비 세계 1위인데 왜 노벨과학상이 안 나오는가 말이다. 딱하게도 노벨상 감의 연구는 당장의 경제성을 따져서는 나오기가 어렵다. 교육과 연구에서 이미 알고 있는 규칙 속에서 문제풀기 선수를 키우는 방식으로도 어렵다. 이래저래 프론티어의 상징격인 원초성(originality)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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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한국에서 노벨상이 안 나온 것은 기초연구의 역사가 짧은 탓도 있으나 특유의 과학기술 전략과 연관된다. 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출범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설립, 67년 과학기술처 설립 이래 우리는 독보적인 선진국 추격형(catch-up) 전략 모델로 성공한 나라다. 그리하여 과학기술 50년 역사는 뛰어난 선진국 벤치마킹에 의한 제도적 인프라 구축과 우수 인력집단의 공동체적 열정으로 빛났다. 노벨상 감의 특출한 과학자는 없었으되 연구집단의 우수성과 사명감이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했다. 또한 국가 연구개발사업의 고강도 실행과 대기업 주도의 본격적인 글로벌화가 거침없이 진행됐다.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로서 최단 기간에 과학기술의 최빈국으로부터 선진국으로 올라섰고 경이로운 압축성장의 신화를 연출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상황은 어떤가. 선진국에서는 드론·무인자동차·로봇·빅데이터 등에 기반한 새로운 거대 시장이 펼쳐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구글화’에 의한 상상력과 문화 기반의 소프트 기술 혁신이 새로운 시장을열고 있다. 또한 기존 기술의 개량과 용도가 다른 기술 간의 연계와 융합으로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가 개발되고 있다. 그 가운데 시장 수요의 불확실성과 ‘파괴적 혁신’으로 인해 기존의 시장 전략과 위상이 위협을 받고 있다. 이처럼 초융합화에 의한 글로벌 혁신 환경의 변화가 대세를 이루며 혁신의 개념과 전략이 질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글로벌 시장 경쟁력과 혁신 역량에는 빨강불이 켜졌다. 자동차·조선·석유화학·철강 등의 경쟁력이 위태롭다. 전자·정보·통신에서 중국과의 기술 격차는 1.8년으로 좁혀졌고, 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샤오미 등 중국 브랜드가 글로벌 강자로 등극하고 있다. 중국이 우리를 앞서는 기술이 18개로 늘어났다.

일본은 20여 년의 장기불황을 벗어나 성장률을 높이며 대졸자 취업률도 97%라 한다. 자동차·화학·소재 등의 기업시장(B2B) 분야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으며, 소니·히타치 등은 소재·장치·발전시스템 등 신사업 발굴에 성공하고 있다. 엔저 효과도 있다지만 고유의 원천 기술력이 다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중·일 삼국의 기술 패권과 시장 경쟁에서 핵심 기술력을 선점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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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Thomas Kuhn의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에 제시된 Paradigm Shift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과학기술 환경이 전혀 다르게 변화해서 문제 자체가 달라졌음에도 old paradigm에서 솔루션을 찾고 있어 방법론을 못찾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파괴적 혁신의 돌파구는 과학기술계의 창의성을 최대로 보장하는 규제 완화, 그리고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R&D 활동의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과학기술 생태계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의 위기감의 근원은 주력산업과 수출 품목의 경쟁력이 흔들리는 가운데 대체할 신성장동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속히 R&D를 통한 가치혁신이 나와 줘야 하는데 R&D 생산성은 ‘코리언 패러독스’로 구조화돼 선진국 대비 성과확산이 매우 낮다. 내년도 R&D 예산은 0.2% 증가에 그쳤다. 그동안 10년간 해마다 10% 이상의 증가세를 보이던 좋은 시절은 갔다. 그러니 R&D 투자의 효율성 높이기가 더 절실하다. 근본적으로 과거의 미션 지향적 과학기술 발전 전략의 관성을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변신해서 새로운 프론티어를 개척해야  한다.

프론티어는 불확실성과 위험성을 수반한다. 그것을 헤쳐 나갈 역량이 있어야 한다. 과학기술 전략에서부터 연구개발 문화, 연구 행태와 연구 관리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혁신가치 창출을 위한 전략과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 창의성과 자율성이 확대된 생태계 문화로 바뀌어야 한다. 노벨상을 겨냥해서가 아니라 과학기술의 새로운 미래, 신산업의 창출, 경제성장 모델의 혁신을 위해서다.

이처럼 중차대한 고비에서 지난 주 세계과학정상회의가 열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과학기술장관회의가 파리에서 대전으로 무대를 옮기면서 OECD 34개 회원국과 13개 협력국,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10개 회원국 등이 참여한 3,800명 규모로 확대된 것이다. 본 회의에서는 향후 10년간 세계 과학기술 혁신의 이정표가 될 '글로벌 디지털 시대의 과학기술 혁신 정책을 위한 대전 선언문'이 채택됐다. 앞으로 UN의 지속가능한 개발 목표 (SDGs) 달성에도 주요 수단이 될 것이다.

선언문의 핵심 주제는 디지털과 혁신이다. 그 요지는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개방형 과학(open science)과 과학 대중화에 기여했다, 과학기술 혁신은 감염병·기후변화·고령사회 등 전 지구적인 도전과제 해결에 필수다, 과학기술 혁신을 위해서는 민간과 정부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협업이 중요하다, 식량안보 등 개도국 지원을 위한 과학기술 혁신도 중요하다는 등의 내용을 골고루 담고 있다. 또한 사물인터넷(IoT), 3D 프린팅, 나노기술 등에 의한 차세대 생산혁명, 연구혁신 정책의 개발, 개방형 과학 지원, 국제협력과 공유 확산,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통합 연구 등을 강조한다.

이번 OECD 과학기술장관회의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하고, 세계과학기술포럼에는 국무총리가 참석했다. 이례적이다. OECD의 '혁신을 위한 전략적 접근'의 성공 사례로 한국의 '창조경제', 독일의 '첨단기술 전략', 핀란드의 '연구개발 혁신 전략'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의장국으로서 대전회의를 개최한 것은 우리 과학외교의 획기적 사건이다. 선진국의 과학기술 혁신 이슈를 개도국을 포함한 지구촌의 핵심 과제로 끌어올리며 과학외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아시아 지역 등 개도국의 과학기술 혁신을 향한 에너지를 국제협력과 연계하여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 국제사회가 개방형 협력 모델을 만들어 과학기술 혁신을 점검하고 발전시키려면 정기적인 과학기술 정책 ‘플랫폼’이 필요하다. 가치혁신에 의해 풀어야 할 인류사회의 당면과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다보스포럼으로 명성을 굳혔듯이, 세계과학기술포럼을 대전포럼으로 만들어 지구촌을 아우르는 과학기술 혁신의 장을 만들기를 소망한다. 한낱 욕심이고 헛된 꿈일까.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그린코리아21포럼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