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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세계과학기술포럼을 대전포럼으로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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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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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그린코리아21포럼 이사장

어제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제작보고회가 열렸다. 리엄 니슨을 맥아더 장군으로, 배우 이정재·이범수가 호흡을 맞추고 이재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전쟁 블록버스터다. 1950년 작전을 진두지휘했던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한국의 재건에는 적어도 한 세기가 걸릴 것’이라고 했다. 그의 예언은 크게 빗나갔다. 53년에 13억 달러였던 국내총생산(GDP)은 60년 만에 꼭 1000배가 됐다. 60년에 79 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올해 2만8700달러를 넘었고 GDP 세계 11위로 고소득 국가다.

 이런 초고속 경제성장이 과학기술력 없이 가능했을까. 그럴 리 없다. 그런데 우리 과학기술계는 해마다 10월이면 ‘잔인한 달’을 맞고 있다. GDP 대비 최고 수준의 연구개발(R&D) 투자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아직도 노벨상을 못 받느냐”는 국민적 실망에 면목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올해에도 생리의학상과 물리학상의 수상자를 냈다. 중국은 사상 최초로 생리의학상에서 85세의 토종 여성 투유유를 수상자로 배출했다. 전통 약초 연구로 말라리아 치료제 성분을 밝힌 공로다. 이런 성과는 90년대 덩샤오핑의 백인계획(百人計劃), 그 이후의 ‘천인계획’, 시진핑 국가주석의 ‘만인계획’ 등이 배경이 됐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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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노벨상이 안 나온 것은 기초연구의 역사가 짧은 탓도 있으나 특유의 과학기술 전략과도 관련된다. 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출범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설립, 67년 과학기술처 설립 이래 우리는 독보적인 선진국 추격형(catch-up) 전략 모델로 성공한 나라다. 과학기술 50년 역사는 뛰어난 선진국 벤치마킹에 의한 제도적 인프라 구축과 우수 인력 집단의 공동체적 열정으로 빛났다. 노벨상 감의 특출한 과학자는 없었으되 연구집단의 우수성과 사명감이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한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 연구개발사업 등의 고강도 실행과 대기업 주도의 본격적인 글로벌화가 거침없이 진행됐다.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로서 최단 기간에 과학기술의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섰고 경이로운 압축성장의 신화를 연출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상황은 어떤가. 선진국에서는 드론·무인자동차·로봇·빅데이터 등의 거대 시장이 눈부시게 펼쳐지고 있다. 한편으로 ‘구글화’에 의한 상상력과 문화 기반의 소프트 기술 혁신으로 새로운 시장과 사회 변동이 예고되고 있다. 초융합화에 따른 글로벌 혁신 환경의 변화로 혁신의 개념과 전략이 질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글로벌 시장 경쟁력과 혁신 역량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전자·정보·통신에서 중국과의 기술 격차는 1.8년으로 좁혀졌고 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샤오미 등 중국 브랜드가 글로벌 강자로 등극하고 있다. 일본은 20여 년의 장기불황을 벗어나 경제성장률을 높이며 대졸자 취업률도 97%라 한다. 엔저 효과도 있다지만 고유의 원천 기술력이 다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위기감의 근원은 주력 산업과 수출 품목의 경쟁력이 흔들리는 가운데 대체할 신성장 동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조속히 R&D를 통한 가치 혁신이 나와줘야 하는데 R&D 생산성은 ‘코리안 패러독스’로 구조화돼 선진국 대비 성과 확산이 매우 낮다. 내년도 R&D 예산은 0.2% 증가에 그쳤다. 그동안 10년간 해마다 10% 이상의 증가세를 보이던 좋은 시절은 갔다. 그러니 R&D 투자의 효율성 높이기가 더 절실하다. 근본적으로 과거의 미션 지향적 과학기술 발전 전략의 관성을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변신해 새로운 프런티어를 개척해야 한다.

 이처럼 중차대한 고비에서 지난주 세계과학정상회의가 열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과학기술장관회의가 파리에서 대전으로 무대를 옮기면서 OECD 34개 회원국과 13개 협력국,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10개 회원국 등이 참여한 3800명 규모로 확대된 것이다. 본 회의에서는 향후 10년간 세계 과학기술 혁신의 이정표가 될 ‘글로벌 디지털 시대의 과학기술 혁신 정책을 위한 대전 선언문’이 채택됐다. 핵심 주제는 디지털과 혁신이다.

 이번 OECD 과학기술장관회의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하고, 세계과학기술포럼에는 국무총리가 참석했다. 이례적이다. 의장국으로서 대전 회의를 개최한 것은 우리 과학외교의 획기적 사건이다. 선진국의 과학기술 혁신 이슈를 개도국을 포함한 지구촌의 핵심 과제로 끌어올리며 새로운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글로벌 공동체의 과학기술 혁신 실행을 위해서는 정기적인 정책 플랫폼이 필요하다. 가치 혁신에 의해 풀어야 할 인류사회의 당면 과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다보스포럼으로 명성을 굳혔듯이, 세계과학기술포럼을 대전포럼으로 만들어 지구촌을 아우르는 과학기술 혁신의 장을 만들기를 소망한다. 한낱 욕심이고 헛된 꿈일까.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그린코리아21포럼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