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 299호 '쾅'…"하나만 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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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에 흠뻑 젖은 SK 투수 김태한(34)이 포수 박경완의 사인을 받는다. 타석의 이승엽(삼성)과 눈이 마주치는 것을 애써 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김태한으로서는 이승엽의 홈런이 그만큼 부담스럽다는 뜻이다. 8회말 2사 2루. 스코어는 이미 삼성이 8-5로 앞서 있다.

김태한이 고개를 끄덕인다. 박경완의 사인이 무엇이었을까. 최고 구속 1백40㎞가 넘는 직구를 던지지 못하는 김태한이고 보면 단번에 고개가 끄덕여졌다는 것은 '변화구'라는 뜻이다. 타석의 이승엽도 그걸 간파했을까. 김태한이 투구동작에 들어간다.

채 2초가 넘지 않는 시간이지만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김태한의 손을 떠난 공이 완만한 궤적을 그린다. 덩치 큰 낙타의 등처럼 서서히 구부러지는 '커브'다!

이승엽의 방망이가 기다렸다는 듯 돌아나오기 시작한다. 새로 들고 나온 '루이빌' 방망이다.

전날까지 '징어'를 사용했던 이승엽은 최근 네 경기에서 홈런을 터뜨리지 못하자 이날 구단에 특별히 부탁해 '사사키' 방망이를 대구로 가져와 세번째 타석까지 사용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느낌이 좋지 않은 듯 네번째 타석부터 다시 '루이빌'로 바꿨다. 방망이를 바꾼 뒤 두번째 타석이다.

최근 네 경기에서 홈런 맛을 보지 못했던 이승엽이지만 스윙은 홈런을 펑펑 터뜨리던 때와 똑 같았다. 그는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고, 초구가 변화구라는 계산을 이미 끝내고 있었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방망이 끝을 떠난 타구는 오른쪽 담장을 넘어 훌쩍 대구구장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장외홈런이었다.

다섯 경기 만에 터진 시즌 31호이자 통산 2백99호 홈런. 이제 대망의 3백호 홈런에 단 한개가 남았다.

김태한의 초구 변화구를 기다렸다는 듯 받아친 이승엽은 최근 7개 홈런 가운데 5개를 초구에 터뜨렸다. 그가 투수와의 수싸움에서 한 수 앞서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삼성은 이승엽의 홈런으로 10-5로 크게 앞섰지만 SK는 9회초 반격에서 디아즈의 결승타 등으로 대거 6점을 뽑아 11-10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선두 SK의 저력은 집채만한 파도가 달구벌을 뒤엎는 듯했다.

이태일 기자, 대구=김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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