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책 속으로] 지우개와 만년필, 문명을 일으키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기사 이미지

문구는 예술가들에게 창조와 영감의 도구이며, 공부하고 일하는 이들에겐 일상의 무기다. [중앙포토]

기사 이미지

문구의 모험
제임스 워드 지음, 김병화 옮김
어크로스, 376쪽, 1만6000원

‘서양 문구의 근·현대사’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을 읽어야 할 분들은 다음 이야기에서 뭔가 꽂히는 게 있는 분들일 것 같다.

아쉽게도 이 책은 동양 문구의 연대기는 다루고 있지 않다. (참고로 『문방사우』(이겸노 지음)라는 책이 있다.) 가까운 과거를 돌이켜 본다면, 서구 문물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지우개·연필·볼펜·만년필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지우개에서 디지털 문구인 스마트폰까지 서양 문구류는 숨가쁘게 우리가 일하는 방식을 바꿨다. 신문 편집에서 만년필이 붓을 대체한 것은 불과 수십 년 전인 1960년대 초반이다. 한때는 만년필이 혼수 목록에 들어갔다.

클립·스테이플러·포스트잇·형광펜이 책상을 장식하고 있는 게 우리네 사무실 풍경이다. 문구류에게 입이 있다면 우리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게 아닐까. 이들 문구류에게는 어떤 ‘탄생 설화’, 사연이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문구의 모험』에 담겼다.

문방사우(文房四友) 라는 표현이 알려주는 것처럼 전통 사회에서 종이·붓·먹·벼루는 선비의 ‘귀한 친구’였다. 『문구의 모험』의 저자인 제임스 워드에게 문구류란 ‘모험’이다. 흥미로운 상징이요 요약이다. 저자는 ‘나는 따분한 것들을 좋아한다(I Like Boring Things)’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문구류라는 ‘따분한’ 일상의 존재에서 모험을 추출해 내기 위해서다.

저자는 “문구의 역사는 곧 인류 문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천연덕스럽게 주장한다. 따지고 보면 사실이다. 선사 시대 벽화를 그린 화가들의 손은 그 시대의 ‘첨단’ 문구류를 쥐고 있었다. 벼루가 탄생한 것은 6000~7000년 전이다. 우리나라 건국 전이다.

시대를 앞으로 감아 보자. 영어에 문구류를 뜻하는 ‘스테이셔네리(stationery)’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727년으로 알려졌다. 이 말은 책과 종이를 파는 상인인 ‘스테이셔너(stationer)’를 말의 뿌리로 삼는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책 좋아하는 사람은 문구를 좋아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은 억측일까.

『문구의 모험』에는 ‘신의 한 수’ 같은 우연 속에서 발명가들이 어떻게 새로운 문구류 혁신을 이뤘는지 나온다. 또 그들은 어떻게 만만치 않은 적들을 상대로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승자가 됐는지 알려준다.

이 책의 또 다른 용도는 선물 찾기에 도움을 받는 것이다. 딱히 떠오르는 선물이 없을 때 문방구에 가면 뭔가 있다. ‘너를 위해 준비했어. 『분노의 포도』의 스타인벡이 애용하던 연필이래’라고 선물을 건네 보는 것은 어떨까.

[S BOX] 로알드 달, 스타인벡, 헤밍웨이 … 문호는 연필을 좋아해

‘졸필이 붓 탓한다’고는 하지만 『문구의 모험』에 소개된 문호들은 필기 수단에 대해 상당히 까다로운 사람들이었다. 의외의 사실은 상당수 문호들이 필기구 중에서 연필을 제일 좋아했다는 점이다. 로알드 달은 매일 아침 그날 사용할 연필 여섯 자루를 뾰족하게 깎은 다음에야 집필에 들어갔다. ‘연필 중독자’였던 스타인벡 또한 24자루의 연필이 준비돼야 글쓰기에 착수했다. 스타인벡은 맘에 드는 연필을 발견한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새 연필을 찾아냈어. 지금껏 써본 것 중에 최고야. 물론 값이 세 배는 더 비싸지만 검고 부드러운데도 잘 부러지지 않아. 아마 이걸 항상 쓸 것 같아.” 헤밍웨이는 파리 시절 어디 가든 공책 한 권, 연필 두 자루, 연필깎이를 지참했다. 가업이 연필 제조업이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 또한 항상 연필을 가지고 다녔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잘 깎이고 너무 단단하지 않은 지우개 달린 연필’을 썼다.

김환영 기자 whanyu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