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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페미니스트 엄마에게 배웠다 … 여성들도 계속 나아가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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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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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니콜 키드먼은 “나이가 드니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그게 나를 힘들게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 촬영을 하든 남편과 두 딸도 함께 옮겨 다닌다. [사진 오메가]

‘개념 배우’. 정치·사회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거나 남다른 정의감 또는 인간애를 드러내는 연예인을 요즘 이렇게 부른다. 선거 인증샷을 올리거나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들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사실이 알려지면 이런 별칭이 붙는다.

17년 만에 연극 공연 니콜 키드먼

 ‘개념 배우’의 원조는 이 사람이 아닐까 싶다. 세계적인 영화배우 니콜 키드먼(48). 1983년 데뷔 이후 영화에서 진취적이고 센 여성 역할을 도맡았다. 치명적 매력의 쇼걸(영화 ‘물랑루즈’)부터 천재 작가 버지니아 울프(‘디 아워스’), 어둡고 비밀스러운 아내(‘아이즈 와이드 셧’ ‘도그빌’), 왕비(‘그레이스 오브 모나코’)까지 입체적이고 심오한 내면을 가진 캐릭터를 그려냈다. 카메라 밖에서는 여성 인권 개선 활동과 실명 직전의 어린이들을 돕는 공익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요즘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연극을 공연한다. 17년 만에 서는 무대에서 맡은 배역은 역시 세상을 바꾼 영국인 여성 과학자다. 지난달 니콜 키드먼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만났다. 스위스 명품 시계 브랜드 오메가가 ‘여성 시계 전시회’를 주최한 자리에서다. 그는 10년째 오메가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흰색 원피스에 15㎝는 족히 넘는 하이힐을 신고 나타났다. 이미 장신(키 1m80㎝)인지라 전체 ‘길이’는 2m 가까이 됐다.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키 때문인지,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는 힐 때문인지 그의 말과 몸짓은 여유롭고 기품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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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구조를 밝혀냈으나 노벨상 수상에서 제외된 여성 과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을 연기하고 있는 니콜 키드먼(사진 위). 키드먼 부부와 두 딸. [사진 니콜 키드먼 페이스북]

 - 요즘 어떻게 지내나.

 “며칠 전 런던에서 연극을 시작했다. 17년 만이다. 1950년대 유전자(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낸 여성 과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 이야기를 그린 ‘포토그래피 51’이란 창작 연극이다. 여성 극작가가 쓴, 휴머니즘 색채가 강한 작품이다.”

 - 로절린드 프랭클린 역할을 맡은 이유는.

 “로절린드는 DNA 구조를 규명한 최초의 X선 사진을 촬영했지만 훗날 노벨 생리의학상은 주변 남자 과학자 3명에게 돌아갔다. 억울하게 연구 업적을 빼앗긴 로절린드의 이야기를 그녀 대신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생화학자였던 내 아버지가 좋아할 것 같아서 선택한 것도 있다.”

 - 배역을 고르는 기준이 있나.

 “직감으로 고르는 편이다. 왠지 모르게 복잡한 여성에게 끌린다. 나이가 들면서 요즘은 세상에 알리고 싶은 이야기를 기준으로 삼는다. 할 말 있는 캐릭터, 이유 있는 주장을 펴거나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 역할을 더욱 좋아하게 됐다.”

 -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선 소감은.

 “무척 겁이 났다. 연극을 하겠다고 결심할 때만 해도 이렇게 공포를 느낄 줄은 몰랐다. 젊을 때는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릴 땐 왠지 ‘될 대로 돼라’는 식의 자유방임적인 태도가 있지 않나.”

 - 그럼에도 연극을 선택한 이유는.

 “안주하지 않기 위해서다. 할까 말까 고민할 때 엄마가 연극을 강권했다. 연습이 잘 안 풀리고 두려움이 커질 때면 엄마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어려운 걸 왜 하라고 그랬느냐. 하지 말걸 그랬다’면서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지금은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 컴포트존에서 멀리 스스로를 밀어내는 바람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길이 없게 됐다.”

 - 롤모델이 있나.

 “페미니스트 엄마와 정치적 성향이 강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엄마는 나와 여동생에게 여성도 남성과 뭐든 똑같이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방해받지 않고 생활할 수 있도록 우리를 여학교에 보냈는데 훌륭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우리가 사는 이유는 세상에 기여하고 남을 돕기 위해서라고 늘 강조했다.”

 - 가장 소중한 시간은 언제인가.

 “가족과 함께 있을 때다. 인생에서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한때다. 내겐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해서 우리 가족 4명은 어디든 함께 다닌다. 런던에서 연극을 공연하는 동안 남편과 두 딸 모두 런던으로 옮겨왔다. 11월 말까지 석 달 동안 네 식구가 런던에서 산다. ‘유랑극단’이 따로 없다.”

 - 가족은 어떤 존재인가.

 “이번 연극을 포함해 내 영화 출연은 온 가족이 회의를 해 공동으로 결정한다. 나 혼자 또는 나만을 위해 결정을 내린 적은 한 번도 없다. 네 살짜리 둘째 딸에게도 의견을 말할 기회를 준다. 물론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역할이 있으면 (가족들이 허락하게끔) 예쁘게 포장한다.(웃음) 언젠가 애들이 ‘엄마가 이거 안 했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면 그렇게 할 것이다.”

 - 당신에게 시간은 어떤 의미인가.

 “진부한 표현이지만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간다. 그게 나를 못 견디게 한다. 큰딸이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한 세 살 때 찍은 비디오를 최근 봤는데 가슴이 너무 아팠다. 지금 일곱 살인데 그렇게 빨리 4년이 지나갔다는 것이. 난 이 세상에 사는 게 행복하다. 어느 순간 내가 세상에 없을 때가 올 텐데 그 생각을 하면 너무 괴롭다. 있을 수 있는 만큼 건강하게 딸들 곁에 있어주고 싶다. 내가 지금 엄마한테 하듯 내 딸들이 ‘엄마가 필요해’라며 전화할 때 받을 수 있도록.”

 -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나.

 “나이가 들면 속도를 줄이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많은 사람이 이제는 삶을 느리게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슬로 타임’이라고 부르는데, 식사를 천천히 하고 움직임도 부러 느리게 한다. 난 ‘슬로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다. 삶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서둘러 하면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는 걸 반복하고 있지 않나. 전화통화를 하면서 요리하는 식으로 멀티태스킹을 할 때 나는 기쁨을 전혀 느낄 수 없다.”

 - ‘젊은 니콜’에게 한마디 하면.

 “언제나 사랑이 옳다. 그리고 항상 행복하라. 90세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내게 해 준 마지막 말씀은 ‘행복해라 니키’였다. 어려워 보이지만 쉬운 일이기도 하다. 결국 그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힘든 상황도 결국 지나간다. 이걸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눈물깨나 아꼈을 텐데.”

 - 잊고 싶은 과거가 있나.

 “뭔가를 잊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려고 한다. 고통과 행복은 늘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 강렬한 대비 때문에 행복이 더 소중하다.”

 - 1분, 1시간, 1일의 자유시간이 주어진다면 ….

 “1분이 생기면 공상이나 명상을 하고, 1시간이 주어지면 아이들과 놀겠다. 하루가 생기면 여유 있는 아침식사를 하고 신문을 읽고 수영을 하겠다.”

 - 어릴 땐 어땠나.

 “피부가 하얗고, 해변에 가는 대신 집에서 책을 읽는 아이였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부모님은 지적 능력을 물려주시려 애썼다. 12살 때 모파상과 도스토옙스키를 읽은 뒤 엄마와 토론했다. 이를 통해 배우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됐지만 아웃사이더로 느껴지기도 했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토요일 새벽 6시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 연극을 배웠다. ‘혼자서 해야 한다’며 아버지는 차를 태워주지 않았다.”

 - 딸들을 어떻게 키우고 싶은가.

 “어떻게 하면 포기하지 않는 것을 가르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면서 기다리는 법을 어떻게 알려줄까 생각한다. 말은 쉽지만 실천은 정말 어렵다.”

 - 여성을 위한 활동을 많이 하는데.

 “12년째 유엔여성기구(UN Woman)에서 폭력 피해 여성이나 소외된 여성을 위해 법과 제도, 인식을 바꾸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여성이 여성을 도와야 한다. ‘포토그래피 51’을 쓴 극작가는 한 번도 웨스트엔드에서 작품을 올려본 적 없는 젊은 여성이다. 그를 도울 수 있다는 것도 기쁨이다.”

[S BOX] 하루 30분씩 명상 … 향수 직접 만들어 써

“소셜미디어? 당연히 사용한다. 애가 넷이나 있다 보면 아이들과 연락하기 위해서라도 사용할 수밖에 없다.”

페이스북·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에 대한 생각을 묻자 니콜 키드먼은 이렇게 답했다. 그는 전 남편인 영화배우 톰 크루즈와의 사이에 입양한 남매를, 2006년 결혼한 컨트리가수인 키스 어번과의 사이에 7살·4살 두 딸을 뒀다.

그는 “소셜미디어를 사용하지만 삶을 지배하게 두지는 않는다”고 했다. 몇 가지 규칙을 정했는데 그중 하나는 잠자리에선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 또 남편과는 문자 메시지나 e메일을 주고받지 않는다. 극히 드물게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가 있다. 문자 내용은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어’다.

그는 “남편과 10년을 함께했는데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원래 이랬다. 그대로 유지할 뿐이다. 남편과의 연락은 아주 친밀하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놔두고 싶다”고 말했다.

키드먼은 고전적인 취향을 여럿 드러냈다. 20대 초반부터 명상을 했는데 요즘도 하루 20~30분씩 명상한다. 향수는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바닐라·파출리(식물의 일종)·사향 등 여러 오일과 향을 섞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향수를 만드는 것을 즐긴다.

호주 시드니,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테네시 주 내슈빌에 자택이 있는데 주로 머무는 곳은 내슈빌 집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다울 수 있고, 그는 엄마다울 수 있는 공간이어서다. 집 주변은 그가 키우는 장미로 가득하다고 한다.

밀라노=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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