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면 안 된다’ 하이힐은 금기, 화장실 갈까봐 물도 안 마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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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통역사는 늘 역사의 한 페이지에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정상회담에서 꼭 필요한 조연이지<br>주인공은 아니다. 사진은 한·잠비아 정상회담(2012년·이명박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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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에서 가장 필요하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사람, 바로 통역사다. 통역사는 대통령의 그림자다. 그들은 정상이 대화하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통역사에겐 철칙이 있다. ‘절대 튀어선 안 된다’는 것. 카메라 앞에 선 정상들 뒤에서 구부정하게 서 있는 통역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여성 통역사의 경우 하이힐은 기피 대상 1호다. 대통령보다 키가 커 보일 수 있는 데다 장시간 수행하는 경우도 많아 자연히 발이 편한 신발을 찾게 된다고 한다. 액세서리도 자제한다. 반짝이는 귀걸이 등이 대화 도중 정상의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영어 통역사였던 이주희(37)씨는 “드레스 코드와 같은 매뉴얼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지만 통역사들의 옷은 튀지 않고 차분한 어두운 색상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세상 속으로] ‘대통령의 그림자’ 통역사

 여성 통역은 뛰어난 외모가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통역이었던 외교통상부 외무관은 미모의 통역관으로 화제가 됐지만 외모 때문에 청와대 사진기자단의 불만을 샀다.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마주보고 있는 사진을 찍으려는데 외국 정상이 여성 통역 쪽으로 눈길을 자꾸 돌렸기 때문이다.

 대통령 통역은 긴장의 연속이다. 한순간의 실수가 국가적인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통역사도 그 어느 때보다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배고픔이나 화장실과 같은 생리 현상까지 피해갈 순 없다. 통역사 사이에선 오찬이나 만찬행사와 같은 ‘밥통(밥을 먹으면서 하는 통역)’이 가장 어려운 통역 중 하나로 꼽힌다. 의제가 정해져 있지 않아 다양한 주제로 대화가 이뤄져 사전 준비가 쉽지 않다. 게다가 정상들이 만날 땐 하루가 분 단위로 나뉘는 살인적 일정을 소화해야 해 식사를 거르기 일쑤다. 배고픔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눈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고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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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회의 통역사인 한국외국어대 조재범(43) 외래교수는 “이동 중에 간단히 끼니를 때울 때도 있지만 그마저 냄새가 안 나는 빵 등으로 해결한다”며 “배고픔은 참을 수 있지만 뱃속의 소리까지 숨길 순 없다. VIP 통역 땐 소리가 날까 봐 늘 배에 힘을 준다”고 했다. 그래서 통역사들에겐 ‘비상식량’이 필수다. 익명을 요구한 한 통역사는 “정상회담과 같은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 자연스럽게 다이어트가 된다”며 “경험이 쌓이면 나름대로 비결이 생긴다. 장시간 통역을 하고 힘들면 당이 떨어져 눈치껏 미리 준비한 초콜릿이나 사탕을 먹는다”고 했다.

 통역사들은 화장실에 가고 싶을까 봐 물을 마시는 것도 최대한 자제한다. 한 통역사가 전한 일화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 유럽 출장을 갔는데 육로로 국경을 넘어 이동해야 했다. 중간에 갑자기 화장실이 너무 급했다. 차를 세워 달라고 하면 VIP를 비롯한 모든 차량이 멈춰야 하는 상황이라 입이 떨어지지 않더라. 기도만 했다. 다행히 국경 검문소를 통과할 때 차가 멈췄고 위기를 넘겼다. 그 뒤로 통역을 할 때 물 마시는 것도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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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의 최정화(60) 교수는 한국 최초의 국제통역사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을 시작으로 5명의 대통령을 위해 12차례 정상회담 통역을 맡았다. 역대 대통령들의 정상회담 스타일은 어땠을까. 최 교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문장이 간단 명료하고 논리적이라 통역하기 좋았다”며 “노태우 대통령은 특별한 기억이 없을 만큼 무난했다”고 했다. 그는 통역이 가장 어려웠던 사람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꼽았다. “김 전 대통령은 거제도 출신이라 그런지 사투리로 그쪽 지방 생선 이름을 많이 얘기했는데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며 “생선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일종의 물고기’로 통역해야만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통역사들에 따르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거침없는 말로 통역을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이 93년 국빈 방한했을 때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가 의제로 다뤄졌다. 당시 프랑스 측은 ‘반환’ 대신 ‘교환대여’하겠다고 언급했는데 YS가 만찬 때 “정상회담에서 미테랑 대통령이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키로 약속했다”고 선언했다. 당시 통역을 맡았던 외무부 심의관이 외교문제가 생길 것으로 우려해 ‘양국 간 기술적 추가합의를 거친 후 도서가 돌아올 것’이라고 통역했다.

 통역사 친화적인 대통령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꼽힌다. 통역사들은 논리적으로 얘기하는 정상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한 통역사는 “DJ의 경우 짧은 시간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게 체득이 된 것 같았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도 변호사 출신이기 때문에 논리적이었다”고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뛰어난 친화력을 자랑했다고 한다.

 이주희씨는 “이명박 대통령은 다른 정상들과의 영어 대화에도 무리가 없었다”며 “비즈니스맨 출신답게 상대방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통역사 자리는 정말 어렵다. 외국어만 잘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중간에 교체되는 일도 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90년 소련을 방문했을 때 러시아어과 교수가 통역으로 뽑혔다. 하지만 통역이 매끄럽지 못해 노 전 대통령은 당시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 측 통역사에게 통역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외교 무대에서 가장 돋보인 대통령은 누굴까. 박근혜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란 대답이 많았다. 김 전 대통령은 ‘논리적인 화술’로 외국 정상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박 대통령은 ‘격조 있는 외교’를 한다는 것이다. 최정화 교수는 “2013년 프랑스 경제인연합회에서 박 대통령의 프랑스어 연설은 여전히 프랑스 친구들 사이에 화제가 된다”며 “외국어 구사가 전부는 아니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도구다. 상대방에게 정성을 보이고 마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대통령이라면 그 결과는 국익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통역사에겐 분석력과 사고력도 요구된다.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홍설영(한영 통역학과) 교수는 “통역사는 멀티태스커(Multitasker)”라며 “현장에 가기 전 연구자와 같이 자료를 조사하고 연구해야 한다. 현장에선 고도의 집중력을 통해 말의 의미를 분석하는 해독가로, 전달할 땐 대중 연설가 못지않은 전달력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뿐 아니다. 통역사는 감정까지도 똑같이 전달해야 한다.

 “상황에 맞는 의사 소통 전략이 필요하다. 한 정상회담에서 통역사가 긴장을 해 통역을 놓쳤는데 ‘지금 상대 정상이 너무 웃긴 얘기를 하고 있으니 저를 위해 웃어 주십시오’라고 얘기해 모든 사람이 웃고 회담 분위기도 좋아진 일화가 있다.”(조재범 교수)

 “장례식 통역이 가장 어렵다. 통역을 통해 슬픔이라는 감정도 표현해야 한다.”(이주희 통역사)

 대통령의 통역사에겐 보안과 국익은 평생 짊어져야 하는 짐이다. 정상 간 대화 내용은 1급 비밀에 해당하고 보안 준수 의무가 부과된다. 민감한 내용이 외부로 나가면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통역사는 “비밀을 알려 달라는 외압도 있지만 국익 손실로 이어질 수 있어 절대 지킨다”며 “정상들의 식사 메뉴처럼 정상회담과 무관하게 보이는 것도 공개되지 않았다면 얘기해서는 안 된다. 통역사는 보이지 않는 가교 역할을 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통역사는 주인공과 나라의 영광을 위해 끊임없이 봉사하는 직업이다. 눈에 보이는 그림자가 돼서도 안 된다. 투명인간이다.”(최정화 교수)

[S BOX] 프리랜서는 6시간에 90만원

국내 통역사 분야에선 여성 파워가 세다.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의 남녀 비율은 평균 2대 8 정도로 여성 비율이 월등히 높다. 외국어대 국제관 1층엔 남자 화장실이 없을 정도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이 한국 사회 구조 문제와 맞물려 있다고 분석한다. 남자는 번듯한 고정 직장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한 데다 통역은 서비스 직종이라 남자가 일하기엔 적절치 않다는 사회 통념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여성이 남성에 비해 언어 감각이 뛰어나다는 점도 작용한다. 통번역대학원 수석 입학과 졸업은 여학생들이 독차지한 지 오래다. 최정화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서양의 경우 통역사의 남녀 비율이 비슷한 데 반해 한국과 일본의 경우 여성 통역사 수가 훨씬 많다. 동양적인 문화 때문”이라며 “여성이 통역을 진행하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영향도 있고, 여성이 남성에 비해 조금 더 꼼꼼하다”고 말했다.

 통역사는 졸업장이 곧 자격증이다. 통역사 자격증을 주는 국가고시가 없기 때문이다. 졸업과 동시에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만큼 통역 교육과정이 혹독해 업계에선 ‘졸업=자격증’으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통역사는 얼마나 벌까. 프리랜서의 경우 보통 6시간 통역에 90만원 안팎을 받는다. 고소득 직종이지만 시즌과 비시즌이 있어 수입이 고정적이지 않다.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개인 실력에 따라 수입은 천차만별이다.

곽재민 기자 jmkwa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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