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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헤드 라인과 트렌드 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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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얼마 전 미국 보스턴에 있는 밀턴 아카데미(고등학교)의 졸업식에 갈 기회가 있었다. 행사가 있기 이틀 전, 학교 근처의 작은 호텔로 이동하던 중 택시 운전기사에게서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모레 밀턴 졸업식에 빌 클린턴이 축사를 하러 오는 것 알아요?"

"그런 일이 다 있느냐"며 되물었더니 기사는 반색하며 말을 이어갔다. "일부 졸업생의 반대를 무릅쓴 클린턴의 초청은 잘 된 결정이죠. 저는 휴가를 얻어 거기 갈 겁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가까이에서 그의 연설을 들을 기회는 없거든요."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지난해에 60회 연설로 무려 9백50만달러(약 1백14억원)를 벌었다는 클린턴이 아닌가.

당일 이른 아침부터 학교 잔디밭에 마련된 졸업식장은 붐볐다. 주변을 둘러보니 일렬로 진을 치고 있는 주요 방송사들의 카메라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전날 힐러리의 자서전 '리빙 히스토리(Living History)'가 처음 공개되면서 일기 시작한 열기가 이곳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클린턴의 발걸음을 따라 10여개의 방송 카메라가 일제히 움직였다. 그는 단상에 올라 이 학교 1906년 졸업생 T S 엘리엇과 50년 졸업생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그리고 자신의 정치 브레인이면서 이 학교 학부모인 아이러 매거지너 등과의 인연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최근 이어지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드러나듯 우리는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에 매몰돼 있다. 앞으로 20년간 이익.책임.가치의 나눔을 확산시키고 국가간 상호 의존성이 갖는 위험 요소를 줄여나갈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를 위해 우리 젊은이들은 국제적 이슈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말하고 토론하는 자세를 갖춰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헤드 라인(담화.기사의 제목)과 트렌드 라인(추세선) 얘기로 말을 이어갔다. "헤드 라인은 오늘의 뉴스고 트렌드 라인은 우리가 가는 방향이다. 큰그림을 못 보는 것은 손전등만 하나 든 채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와 같다. 통합만이 분열로 인한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

사람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으며 녹음기에 '비싼 연설'을 담는 사람도 상당수 엿보였다. 다시 클린턴의 말. "우리 앞에는 세 가지 과제가 던져져 있다. 우선은 요즘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연설을 끝내면서 그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수업의 마지막 장을 열자"고 했다. "자유는 깊은 생각과 그 연후의 행동을 원한다."

뙤약볕 아래서 40분 가량 계속된 연설로 클린턴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서서 한 사람씩 호명돼 나오는 1백73명 졸업생 모두에게 악수와 축하의 말을 건넸다. 미래 젊은 인재들에게 트렌드 라인의 의미를 되뇌게 하는 듯했다.

문득 철학자 박이문씨가 산문집 '길'에서 이제는 떠나가야 할 삶의 비애를 놓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축복보다는 가혹함을 느낀다"고 썼던 것을 떠올렸다.

이날 클린턴이 젊은이들에게 표시한 애정은 시간의 흐름을 축복으로 돌려놓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디선가 보이지 않게 될 발자국은 삶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 뚜벅뚜벅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고 싶다"는 박이문씨의 '발자국'이 클린턴의 '트렌드 라인'과 묘하게 겹쳐왔다.

허의도 문화부장